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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내 나이 8살 때의 일이다.
(2)그 당시 우리집은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3)대대로 경영하던 포목상을 접고 조상님들 뵐 낯이 없다며 실의에 빠져 술로 날을 보내던 할아버지는
(4)어느날 주무시듯 돌연히 가버리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도 뒤를 따르듯 조용히 떠나셨다.
(5)늘 나를 업어주고 안아주기만 하던 다정한 할머니의 죽음에 나는 울고 또 울었다.
(6)돌아가시기 전날, 언제나처럼 나를 불러 무릎에 앉히고는
(7)네가 이 집 장손이니 정신차리고 어머니 아버지 잘 도와드리라
(8)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던 그 말이 유언이 될 줄이야.
(9)아버지는 슬퍼하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10)장사를 그만두었으니 나와 2살 위의 누나, 그리고 또 동생을 가진 어머니를 어떻게 먹여살릴지 막막했다.
(11)더구나 집을 팔아 포목상을 정리할 때 들었던 빚을 갚고 나면곧 5식구가 될 가족이 갈 곳을 찾아야 했다.
(12)그런 아버지에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오랜 친구분이 찾아오셨다.
(13)여기서 멀리 떨어진 곳이긴 하지만 값도 아주 싸고 좋은 집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14)썩은 동앗줄이라도 부여잡고 싶었던 아버지는 두말없이 그 분을 따라나섰다.
(15)현재의 서울 모처에 있는 그 곳은 그 당시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다.
(16)그러나 집은 꽤나 크고 깨끗했고, 가격이 헐값이나 거저없는 가
(17)격이었다.
(18)아버지는 놓칠세라 재빨리 이 집을 샀다.
(19)며칠 뒤 할아버지 친구분은 이사 준비를 시작한 우리집에서 술을 마시며 귀띔을 해주셨다.
(20)사실 그 집은 도깨비터에 지어진 도깨비집이라는 것이다.
(21)도깨비집은 집주인이 잘하면 주인을 부자로 만들어주지만
(22)주인이 제 분수를 모르고 헛되이 살면 주인의 가세를 기울게 해
(23)주인을 내친다고 한다.
(24)허나 아무리 선량하고 좋은 주인이라도 그 주인이 10년만 그 집
(25)에 머물 수 있고,
(26)10년이 지나면 새 주인이 들어오게끔 주인을 내쫓는다나.
(27)전 주인이 도깨비터라는 말을 듣고 그 땅을 사 거기에 집을 지었
(28)돈을 좀 만지게 되자 도박판을 전전하고 기생을 데려와 축첩을
(29)하자 4년이 채 안되어 집이 망하고 종손이 급사하여
(30)그 집을 팔고 떠났다고 한다.
(31)주변 사람들은 전 주인이 쫓겨난 것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32)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술김에 그저 웃기만 하셨단다.
(33)노인의 부질없는 이야기로 흘려버리기엔, 한편으로는 새 집에
(34)서 그것을 시험해보고 싶으셨다고 했다.
(35)새 집에 오고 나서 어머니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했다.
(36)꿈 속에서 이상하게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키가 엄청나게 크
(37)고 덩치도 큰 사람이 다짜고짜 안채 문을 열고 들어왔단다.
(38)그러더니 어머니한테,
(39)’맏며느리야, 이제 너희 집안이 실(絲)장사는 운이 다 했으니 먹
(40)는 장사를 해라.
(41)사람이 헐벗어도 서럽지만 굶는 게 더 서럽지 않겠니’ 하더니
(42)갑자기 여닫는 사람도 없는데 온 집안 문짝이란 문짝들이 쾅 하
(43)고 일제히 닫히더라는 것이다.
(44)그 쾅 소리에 깬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꿈 이야길 했더니
(45)아버지가 ‘그러잖아도 밥장사하자고 하려고 했더니만 잘 되려나
(46)’보다’ 고 좋아하셨단다.
(47)아직 밥장사를 제대로 시작할 여력이 안되어 어머니가 새벽마
(48)다 두부를 만들어 아버지가 내다팔았는데,
(49)이상하게도 두부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잘 만들어졌고 또 잘
(50)옛날에는 일일이 불을 때어 요즘처럼 화력이 일정치 않아
(51)자칫 끓이다 거품이라도 잘못 생기면 두부가 잘 만들어지지 않
(52)고 쉬어버리는 일이 잦았다.
(53)그런데 새 집에 와서는 콩을 불려 두부를 만들면 백발백중,
(54)실수하거나 상하는 일이 없이 두부가 어찌나 잘 만들어지는지
(55)아버지는 늘 남들보다 가장 이른 시간에 장에 나가셨고,
(56)누구보다 빨리 두부를 몽땅 팔고 들어오셨다.
(57)인근에 두부가 너무나 맛있다고 소문이 나서 우리집에 두부 만
(58)드는 법 좀 알려달라고 아주머니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59)남다른 요령도 없다며 손사래를 치는 어머니의 환한 얼굴이 가
(60)장 많이 기억나는 나에 비해,
(61)훗날 시집도 못 가고 20살에 손말명(처녀귀신. 뒤에 나오지만
(62)누나가 일찍 돌아가셔)이 된 누나는
(63)부뚜막 위에 치마 속 고쟁이를 다 내어놓고 걸터앉아 눈만 마주
(64)•치면 히쭉쭉 웃는 얼굴붉은 아주머니가
(65)제일 많이 기억이 난다고 하셨다.
(66)아주머니인지 할머니인지 애매한 얼굴에,
(67)부엌을 휘적휘적 돌아다니며 아무 것도 들지않은 빈 솥뚜껑이
(68)며 그릇들을 수시로 만지작 거리고
(69)밥을 하거나 물을 끓이면 뜨겁지도 않은지 그 솥 뚜껑 위에 앉아
(70)서 벙싯벙싯 웃기만 했단다.
(71)나는 나중에야 그 아주머니가 조왕신이겠느니 생각만 했다.
(72)시간이 흘러 어머니 배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던 동생이 태어났
(73)동생이 태어난 후 아버지는 두부장사는 접고 본격적으로 밥장
(74)사를 시작하셨다.
(75)바깥채 건물을 트고 부뚜막을 하나 더 만든 뒤, 그 앞으로 담장
(76)을 치고 밥상을 여러 개 놓았다.
(77)밀려드는 손님을 더 이상 어머니 혼자 힘으로는 감당을 할 수 없
(78)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들을 셋이나 썼는데도 그들은 해만 떨
(79)어지면 녹초가 되곤 했다.
(80)늘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누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기 동생
(81)을 업었다.
(82)그러고 집안 일을 돕기도 했지만 누나는 왕왕 동생을 업고 동네
(83)밖을 돌다가 해가 떨어질 무렵 집에 돌아왔다.
(84)어머니는 너무 멀리 나가지 말라고 늘 누나를 타일렀지만 누나
(85)는 막무가내였다.
(86)하루는 아기업은 누나를 학교 돌아오는 길에 만났다.
(87)누나는 ‘너 집에 가기 무습지 않니?’ 하고 조용히 물어보았다.
(88)’항상 집이 시끌시끌한데 뭐가 무습느냐’고 하자, 누나는 그 이
(89)상 말을 안 했다.
(90)한참 후에나 들었지만 누나는 온 집안에 귀신이 드글드글하다
(91)고 했다.
(92)항상 지붕 위에 사람 발바닥 손바닥이 보이는데 그 크기가 너무
(93)나 크고 사람 몸통은 보이지 않고 손발만 뵈고,
(94)손님들 앞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봉두난발의 남녀들이 온
(95)집안을 휘젓고 다니는데
(96)이들이 자세히 보면 손발이 없고 옷자락만 질질 끌면서 안 들어
(97)가는 곳이 없단다.
(98)사람들 틈에 섞여서 낄낄대고 웃고 좋아하는데 그 소리가 나면
(99)어손님이 떼로 더 들어온단다.김없이
(100)그것도 비슷한 무리들이 잔뜩 섞여서.
(101)이들은 해가 지면 거의 대부분은 나가는데,
(102)이들이 나가고 나면 수염을 배꼽까지 기르고 코가 시뻘건 영감
(103)이 대문 단속을 하고 마당 한가운데에 주저앉는단다.
(104)이 영감이 나오면 낮에 들어왔던 것들이 열어달라고 대문을 두
(105)들난리를 치는데기고
(106)영감은 그럴 때마다 해뜰 때까기다리라며 호통을 고래고래지
(107)호통을 칠 적마다 집이 울리고 문 밖의 것들이 비명을 지르는데
(108)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고
(109)’바람이 심하게 분다’ 며 그냥 잠자리에 든다는 것이다.
(110)나는 누나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었다.
(111)누나는 원체 나보다 몸이 약해 밥을 먹다 체하기도 잘했고 열이
(112)나서 드러눕기도 잘했다.
(113)지금 생각하면 누나가 남들보다 그렇게 일찍 가려고 그랬던 건
(114)아니면 원래 그렇게 갈 운명이기에 도요사스런 것들깨비집의
(115)을 전부 볼 수 있었는지…..
(116)그 집을 일찌감치 떠났으면 누나가 시집도 가고 잘 살지 않았을
(117)까 하는 회한에 종종 잠기곤 한다.
(118)시간이 흘러 나는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되었다.
(119)우리집은 그 옛날 이사갈 곳을 찾지못해 발을 동동 굴렀었다는
(120)말누구든 거짓말이라 할만큼 부유해졌다.을
(121)어릴 적부터 잘 먹고 잘 자란 동생은 그 나이 때의 나보다 힘도
(122)세고 키도 크고 덩치도 컸으며,
(123)또래 아이들에 비해 가진 물건이 많아 늘 골목대장 노릇을 도맡
(124)아 했다.
(125)그런 동생이 가끔또래 아이들과 싸움을 하거나 때렸다고 다른
(126)아이들 어머니가 집에 찾아오는 것,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