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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정체성 정치, 이제 뒤돌아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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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슈피겔지 기자 르네 피스터 ‘잘못된 단어’

“정치란 결국 국민 모두를 끌어안아야 하는 게임”

특파원 경험 통해 접한 미국식 정체성 정치 비판

동성애자 크리스 라이언스(왼쪽)와 동성애 혐오자 핀바르 오브라이언이 2013년 아일랜드 정부가 마련한 ‘시민의회’에서 만나 서로의 존재를 이해한다며 포옹하고 있다. ‘우리가 이제껏 당한 만큼 너도 당하는 게 마땅한 정의’라는 과도한 정체성 정치의 논리는 분열만 낳을 뿐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책을 열면 첫 사례는 이안 부르마다.

‘0

년 : 현대의 탄생, 1945년의 세계사’ 같은 책으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역사가. 뉴욕리뷰오브북스 편집장으로 일한 지 16개월 만에 해고됐다. 캐나다의 음악인이자 방송인으로 성폭행으로 기소됐으나 무죄 판결을 받은 지안 고메시 이야기를 다뤄서다. 페미니스트들의 비판, 공개 사과 요구가 줄이었다. 보다 못한 중견 작가, 역사학자들 10여 명이 옹호에 나섰지만 결론은 해임.

네덜란드 출신으로 2차 대전 때 나치를 피해 도망친 유럽 지식인들의 안식처였던 바드 칼리지에서 교수를 지낸 부르마는 “다시 실향민이 된 기분”이라 토로했다. ‘재기 넘치는 역사학자’는 이제 ‘미투 운동 모독자’인 불가촉천민이 됐다.

과도한 정체성 정치에 대한 독일 슈피겔지 기자의 반론

‘잘못된 단어’. 이 책을 쓴 독일 슈피겔지 기자 르네 피스터는 2019년 워싱턴 특파원으로 미국 땅을 밟은 뒤 굳은 결심을 한 것 같다. 이런 식의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라면, 대서양 건너 독일에까지 침투하는 걸 반드시 막아야겠다는.

독일 진보 언론 슈피겔지의 기자 르네 피스터. 미국 특파원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잘못된 단어’에서 과도한 정체성 정치는 오히려 민주주의를 해친다는 주장을 펼쳤다. 문예출판사 제공

저자는 2013년 버락 오바마 정부의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 도청 사실을 폭로했던, 미국으로 이사 온 동네가 하필 창조설을 옹호하는 마이크 펜스 당시 미국 부통령에게 항의하기 위해 골목마다 무지개 깃발을 잔뜩 꽂아둔 게 정말 마음에 들었다는, 진보 언론사의 베테랑 기자다.

그런 네놈도 결국 주류 백인 기득권 남성이구만, 침 탁 뱉고 바로 책 덮어도 된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림과 미국 내 각종 문화전쟁의 속내가 궁금하다면, 그리고 마초 가부장 백인 남성 기득권자 또한 한 표를 갖는 게 민주주의라는 걸 받아들인다면, 들여다볼 만하다.

NYT

의 1619 프로젝트

vs

트럼프의 1776 위원회

기자의 책답게 부르마 같은 사례 취재가 빼곡하다. 문화전쟁의 여러 형태, 노예제라는 원죄를 기억하기 위해 미국의 건국일은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이 아니라 아프리카 노예가 버지니아에 처음 도착한 1619년 8월이어야 한다는

‘1619

프로젝트’ 이야기 같은 것들이 수두룩하다. 또 독일 기자답게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미시권력 이론이 민권변호사 데릭 벨의 ‘비판적 인종이론’과 법학자 킴벌리 크렌쇼의 ‘교차성 이론’으로 어떻게 이어졌는지도 보여준다.

프로젝트’에 맞서 도널드 트럼프는 대통령 재직 당시

‘1776

국가위원회’를 설치했다. 일종의 미국판 자학사관, 국정역사교과서 논란이라 부를 수 있는 사태인데, 저자는 정치적 올바름을 신봉하는 학자, 언론인이 아니라 미국의 보통 백인들의 시선에서 이 사태를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뉴욕= 로이터 연합뉴스

비판적 인종이론 관점에서 미국 독립이 언제냐는 중요치 않다. 그보다 노예제 연장 ‘음모’였다는 게 더 핵심이다. 모든 게 사악한 백인의 음모다. 그래서 백인 이성애자 남성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조상들의 죄악을 회개해야 하지만, 그 회개의 진정성은 언제나 의심받아 마땅하다. “구원을 약속하지 않고 오직 영구적 자책의 험난한 길만 요구하는 성직자의 냉혹함”이다.

교차성 이론은 흑인 여성 레즈비언은 여성이니까 흑인 남성 동성애자보다 더 취약한 존재라는 이론이다. 백인, 중산층, 시스젠더, 고학력, 비장애인, 기독교, 영어 사용자 같은 정체성의 조각들을 어떻게 조립하느냐에 따라 복잡한 피해자 ‘위계구도’가 생겨난다. “무슬림 이민자가 인종차별을 당하는데, 고학력 백인 여성은 부당한 연봉에 항의할 권리가 있을까”라는 식의, 누가 감히 더 크게 울 권리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이어진다.

권력관계 음모론이 닿는 곳은 인식의 황무지

슈테파니 클레이 독일 함부르크대 사회학 교수는 “세계를 오직 권력 서사로만 보기 시작하면 객관적 학문과 입증가능한 사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위험한 믿음을 조장하게 될 것”이라 지적했다. 이거 혹시 진보가 트럼프를 비판했던 그 논리 아니던가.

잘못된 단어·르네 피스터 지음·배명자 옮김·문예출판사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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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7,000원

중도 자유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양극단으로 달려간 보수와 진보는 일종의 데칼코마니다. ‘역사의 종언’으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자유주의와 그 불만’에서 보수 포퓰리즘과 진보의 정체성 정치가 도달하는 곳은 “아무것도 사실이 아니고 모든 것이 가능한 인식의 황무지”라고 해둔 건 클레이 교수의 우려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후쿠야마가 남성이라 문제라면, 한나 아렌트도 있다. 보편적 자유를 옹호했던 그는 유대인 여성이었음에도 여성, 흑인처럼 정체성 그 자체를 정당성의 근거로 삼는 정치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오바마와 메르켈의 집권 전략을 보라

현실 정치도 그렇다. 오바마는 백인을 무려 ‘배려’씩이나 하는 태도를 보여 백인에게 표를 구걸한다고 비판받았으나 미국 최초의 유색인 대통령이 됐다. 오바마가 남자라 그렇다면, 16년간 집권한 메르켈도 있다. 메르켈은 여성, 동독, 물리학자라는 3중 교차적(!) 정체성을 기반으로 중앙 정계에 빨리 진출해 자리 잡았으나, 정작 페미니스트들과 옛 동독 지역 주민들의 온갖 비판에도 정체성 정치에 대해서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2017년 독일 총리 관저에서 여성계 인사들과 생일 파티 중 즐거워하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왼쪽 두 번째) 총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공개적인 언급을 회피해오던 메르켈 총리는 퇴임 직전에야 자신이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고 발언했다. 베를린=

AP

연합뉴스

오바마와 메르켈은 국민 중에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 최신 리스트를 매 순간 업데이트하며 그걸 고학력 중산층 남성 혹은 여성으로 나고 자라 버린 원죄에 대한 올바른 회개라 믿는 이들도 있지만 가부장적인 이성애자 남성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정치 지도자는 결국 ‘그들 모두’를 대표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래야 진보는 전체적인 통합 메시지를 내놓을 수 있고, 그럴 때 트럼프 같은 정치인의 등장도 막을 수 있다. 저자의 궁극적 포인트다.

조태성 선임기자 (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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