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개장이 육‘개장’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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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병자호란 후, 200년쯤의 세월이 흘렀다. 18세기 들면서 청에 대한 적개심은 줄어든다. 청나라는 유럽 등외국의 문물도 받아들인다. 청나라의 융성기다. 한반도에는 북학, 실학이 발전한다. 적개심 대신 청나라를보고 배운다는 풍조가 시작된다. 18~19세기에는 청나라 풍습을 따라, 개고기 식용을 반대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2)조선 후기에는 개고기 식용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이들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이들이 뒤섞인다.
(3)연경(북경)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을뿐더러 개가 죽으면 땅에 묻어준다. 심상규(1756~1838년)가 북경에 갔을 때 경일(庚日, 복날)을 맞아 개고기를 삶아 올리도록 하였다. 북경사람들이 매우 놀라면서 이상히 여기고 팔지 않았다. 심상규가그릇을 빌려 삶았는데 그 그릇을 모조리 내다 버렸다. (황해도)장단의 이종성(1692~1759년)은 잔치에 갔다가 개장국을 보고 먹지 않고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을 접대하는 음식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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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cene #3. 육개장은 쇠고기로 마치 개장국 같이 끓여 낸 것이다
(2)육개장(肉狗醬)은 ‘육(쇠고기)+구장’이다. 구장은 개장국을 의미한다. 육개장은 쇠고기를 주재료로 마치 개장국 같이 끓인 것이다. 일제강점기초기 경부철도가 뚫렸다.
(3)경부철도가 생기면서 작은 도시들이 갑자기 커졌다. 대구가 대표적이다. 사람들이 역을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몰리면 시장이 선다. 시
(4)장이 서면 사람들이 더 모여든다. 이들에게는 음식을 먹을 공간이 필요하다. 조선후기에 이미 개고기 식육파와 비 식육파가 갈렸다. 개고기를 피하는 사람들도 많다. 개장국을 끓이되 쇠고기를 사용하는 집들이 생긴다. 대구 육개장의 시작이다. 육개장의 이름이 ‘대구탕(大邱)’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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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육개장은 개장국(狗醬·구장갱)을 대신한다. 일제강점기 초기, 경부철도 건설로 대구에사람들이 모이고 시장이 선다. 이미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이 많다. 대구 명물 육개장이 나타난다. 대구탕(大邱湯)이라 부르기도 한다. 육개장은 ‘쇠고기+개장국’이다. 개장국 스타일로끓인 쇠고깃국으로 시장통 등에서 팔던 주막 음식이었다. 육개장 끓이는 법을 설명하는 칼럼(1939년 7월 8일자 동아일보) 제목은 ‘오늘 저녁엔 이런 반찬을’이다. 필자는 한식연구가 조자호 씨. 육개장은 길거리 식당 음식에서 가정으로 확산된다. 쇠고기 부위를 한정하지는 않고 ‘여러 종류의 국거리’라고 표현했다. 고기는 삶은 후, 반드시 손으로 찢고 양(내장)은 칼로썬다. 대파를 많이 사용한다. 고기와 고춧가루, 고추장으로 양념한 채소를 버무려 다시 한소끔 끓여서 낸다. 한 번 삶아낸 밀국수를 넣어서 먹으면 맛이 희한하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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