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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직후의 독일인들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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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독일 지도자들은 국가에 의한 집단범죄틀 명시적
으로 인정하지 안는 경향이 있없지만, 나치 정권 하에서 유대
인들이 당한 고통에 대해서는 인정햇다. 아데나워는 1952년
체결된 콤심부르크 조약의 일부로 이스라일에 35억 마르크틀
지불하기 위해, 이틀 주저하는 독일연방의회지 설득하기도
햇다. 당시 독일인 가운데 오직 7 7%만이 이스라일에 대한 배
상울 지지햇다. 시민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독일인의 고통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없다.
그 당시 독일인 대부분은 과거지 잊고 싶어 햇고 만약 그들
이 나치 시대의 어떤 것’ 기억하고자 햇다면 그것은 그들이
당한 엄청난 피해없다. 당시에 세워진 몇 안 되는 공식 기념물
중 하나는 1952년 베름린의 메량담에 있는데, 전쟁이 끝난 후
유렵 각지에 흩어저 있년 그들의 집에서 강제주방당한 독일인
들올 위한 것이없다.
옛 나치의 집결지엿던 극우 정당 ‘독일당’ 의 볼프상 헤들러 연
방하원의원은 1949년 11월 25일 이렇계 말햇다. 사람들은
“유대 민족에 대한 히틀러의 만행을 두고 너무 야단법석올 카
니다. 유대인들올 가스로 죽인 방법이 적절햇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갈길 수 있습니다. 그들올 제거할 다른 방법도 있없올
테니까요’
이 발언은 당시에도 엄청난 공분올 일으켜다. 결
국 헤들러는 기소되없다. 하지만 전 나치당원이면 판사 세 명
에 의해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선고되없다.
출처: 전후 일본과 독일이 이웃 국가들과 맞은 관계는 왜 달컷
눈가; 월터 F. 해치 저, 이진모 옮김, 책과함께, 2024년, 91~9
2쪽

미국의 종군 사진작가 윌리엄 스콧(William Scott)이 전후 무명의 국방군 출신 참전용사를 만나 히틀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병사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놈은 무능한 ㅂㅅ이지. 그럼에도 딱 한 가지 잘 한 일이 있는데, 바로 유대인들을 다 죽여 없앤 거야.””

<제 2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 에른스트 도이어라인>

.그리고 지금 독일의 제1야당은 네오나치가 득실거리는 극우정당 AfD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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