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 텍스트 확인
리영희의 증언1]
국민방위군 사건은 1950년과 1951년에, 즉 6.25 전쟁 중 대한
민국 제1공화국 정부가 강제장집한 국민방위군 수만 명이 국
회, 정부 및 군 고위총의 예산 통령 및 뇌물 범죄 탓에 보급올 밭
지 못하여 그대로 희생원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 최약의 군수
비리 사건이자 국가 폭력이다. 사실상 한국판 임팔
수
준. 피해 정도만 보면 오히려 임팔 전투보다 훨씬 심하다!
병력수송 비용과 식비 등올 통령하여 신정동지회 국회의원 20
여 명에게 공작비와 여비 등 명목으로 제공햇다. 그 탓에 장집
된 방위군이 흑한기 속에 굶주리면서 행군하여 기아와 동상으
로 사망하없다.
적군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부정부패와 인명경시로 100여 일 사
이에 전투에 참여논커넣 총 한 번 못 만저 본 장병 최소 7만 7천
[3]
12만 명
후방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없으며 전체의 8
0% 가랑이 폐인이 되다시피 햇다: 수족손실의 중상자도 보수
적인 학계에서 조차 최소 20만 명 이상으로 본다 [5] 이승만 정
권율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학자 유영익[6] 교수도 장정 9만
명가량이 동사, 아사; 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으로 규정햇으며,
[7] 서북청년단 창립멈버뒷터 손진(표I트, 1920~2017)
서전에서 이 사건을 ‘대한민국 청년 운동사에 씻을 수 없는 근
오점’이라고 평가있다 [9]
이 사건으로 신성모 국방부 장관[1o-이 물러낫다. 그리고 국민
방위군 사건의 진상이 규멍되논 과정올 실시간으로 지켜보앞던
부통령 이시영은 이승만 정부에 거대한 회의감올 느끼고 사표
틀 제출하여 스스로 행정부 부통령직에서 물러싸올 지경이없
다:
N
9 C
전투[2]
{[4]ol
)[8]도 자
1951년 거창 양민 학살사건에 이어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지자
이미지 텍스트 확인
이시영은 이승만 정권에 크게 실망하여 정권올 비판하여 국민
에제 전하는 글을 남기고 부통령직 사회서지 제출하없다.
나는 정부 수립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관의 지위에
앉은 인재로서 그 적재가 적소에 배치I 것’ 보지 못하
엿다. 그러한 데다가 담관오리는 가능 곳마다 날뛰어 국
민의 신망을 상실레 하여, 나아가서는 국가의 존업올 모
독하여서 신생민국의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지 던지고 잎
으니 이 얼마나 눈물겨운 일이려 이 어찌 마음 아프 일이
아난가:
그러나 사람마다 이틀 그르다 하되 고칠 줄올 모르며 나
쁘다 하되 바로잡으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것의 시
비틀 논하는 그 사람조차 관위에 앉게 되면 또한 마찬가
지로 탁수오류에 힘쓸려 들어가고 마니 누가 참으로 애
국자인지 나로서는 흑백과 욕석올 가길 도리가 없다 더
구나 그렇듯 관의 기울이 흐리고 민막(토Y돌)이 어지러운
것올 목도하면서도 워낙 무위무능 아니하지 못하게 된
나인지라 속수무책에 수수방관할 따름이니 내 어찌 그
책임올 통감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한 나인지라. 이번에 결연코 대한민국 부통령직올
사임함으로씨 이 대통령에게 보좌의 책임올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올 셋으려 하여 아울러 국민들 앞에 과거 3년 동
안 아무 업적과 공현이 없없음올 사과하는 동시에 일개
포의로 돌아가 국민과 함께 고락과 생사름 같이 하고자
한다.
국민방위군 사건.
전에 보도연맹사건 쓸때도 한말이지만 “”꺼무위키를 어케믿음””이라고 생각할분은 직접 책,논문 찾아봐도 됨.
보도연맹이 ‘학살’이라면 이건은 부정부패와 이승만정권의 무능을 보여준 사건임. 이 정도 부정부패가 있는 정권의 총책임자가 어떤 인물일지는 상상에 맡기고, 몰랐다는 헛소리는 금지
이승만을 존경한단 사람들 많은데(최소한 온라인에는)
이런 인물 존경하는데 왜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 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