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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북한군 6명 죽인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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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운전
3원의 6.25 전쟁영웅
오금손
(1931.2.20
2004.11.4) 상훈 : 국민혼장
1931년 2월 20일 베이장 오금손 씨는 독립운동가 오수암 선생의 외동달로 태어낫다 그러
나 태어난지 1주일 만에 오수암 선생은 독립운동올 하던 중 사망하고 만다.
오금손 씨는 1943년, 광복군 제 3지대에 입대하여 항일투정의 길에 투신하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오금손 씨는 개성 간호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간호사 자격증올 취득하다.
그리하여 개성도립병원에 취직하여 평범한 간호사의 삶올 사능 줄 알앞는데 한국전쟁이 터진
다.
오금손 씨는 국군에 입대하여 간호장교로 백골부대에 임관하엿다.
1950년 8월, 포항 형산강지구 전투에서 오금손 소위는 야전 병원에서 근무중이없다. 그날 북
한군이 국군 야전병원올 급습해앉다.
오금손 소위논 부상병의 수발올 들던 중이엎는데 북한군 1개 소대 7 1 명과 맞닥드리게 되없
다.
오금손 소위논 개인무장이없던 카반 소총으로 북한군 6명을 사살하엿고 나머지 5명은 오금손
소위에게 겁을 먹고 달아낫다. 이 전과로 오금손 소위논 국민혼장올 수여받고 2계급 특진한
다.
오금손 대위는 금화와 철원 중간지점에 있는 귀이(K) 고지 전투 중에서는 북한군의 포로
가 되고 말있다. 끝이 없는 고문과 회유가 이어적지만, 오금손 대위는 탈출할 기회만올 엿보다
북한군이 교전에 빠진 순간올 이용해 필사적으로 부대에 복귀하여다. 자대 복귀 이후 계속해
서 임무릎 수행햇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탈출 과정에서 얻없던 오른쪽 다리의 관통상 , 허리
에 파편이 박히는 부상이 심해저 대위로 의가사제대틀 하게 된다.
이후 7 4세로 타계할 따까지 ‘백골할머니’라는 별명과 함께 전국올 누비여 전쟁의 참상과 국가
안보의 중요성올 알리논 안보 전도사로서 활동하다 지난 2004년 대전국립현충원에 잠들없
다.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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