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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이름번호 바꾸며 삶에 의지 드러냈는데…가해자 선고 직전 극단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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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린가명16은 그날따라 기분이 좋았다. 가을 옷이 필요했는데, 평소 눈여겨봤던 아크메드라비 후드티를 아빠가 결제해줬기 때문이다. 외출하기 전엔 집에서 엄마랑 김장을 하면서 수다를 떨었다.

그러나 웃으면서 집을 나갔던 혜린은 그날 밤 울면서 귀가했다. 그리고 방문을 잠가버렸다. 엄마가 몇 차례 노크했지만 인기척을 보이지 않았다. 문을 잠그는 일도 드물지만, 적어도 엄마 부름에 대답은 했다. 엄마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급하게 아빠를 불러 문을 따고 들어갔지만, 혜린은 방에 없었다. 베란다 창문이 열려 있을 뿐이었다.

슬픔도 잠시였다. 부모는 딸의 선택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죽을 아이가 절대 아니었다. 울면서 돌아온 딸에게 말 못할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유서엔 누군가의 휴대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사건의 실체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혜린이가 부모에게 진실을 밝혀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엄마 아빠는 딸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딸을 위해 부모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부모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딸이 유서에 남긴 번호로 전화했더니 혜린이 친구가 받았다. 부모는 그 친구를 통해 혜린이가 페이스북 단체 채팅방에서 또래에게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아이는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던 것일까.! 엄마아빠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혜린이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딸의 페이스북 계정에 접속하기 전엔 잠시 망설였다. 판도라 상자’를 여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들춰내서 읽어야 했다. 도대체 딸이 왜 죽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2020년 9월 24일 오후 8시42분. “너 혜린이랑 잘 때 조심해. 강간으로 신고당해.” A양 등 또래 10명이 모인 채팅방에서 B군이 혜린의 남자친구에게 말했다. 혜린의 남자친구가 “너가 무슨 상관이냐”고 따지자, B군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진짜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혜린이가 선배랑 술 먹고 떡 치고 강간으로 신고했거든.” 혜린의 남자친구는 한동안 답하지 않았다. 혜린도 침묵을 이어 갔다. 혜린이 그토록 숨기고 싶어 했던 피해 사실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까발려졌고, 성폭행을 신고했다는 이유로 손가락질받는 상황이 됐다. 혜린은 부모에게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성폭행당한 사실이 알려지는 걸 극도로 꺼렸던 탓이었을 거다.

5시간이 지난 다음날 새벽. 조용해진 단체 채팅방에서 A양이 다시 불을 지폈다. “아니 그래서 이건 어떻게 되는 거야? 혜린이가 걸레라는 게 팩트인겨?” A양은 평소 혜린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고, 심한 욕설을 해온 문제적 인물이었다. A양은 혜린이 인스타그램에서 수백 명의 팔로어가 생기며 인기를 얻자 “꼴 보기 싫다”며 게시물을 내리게 할 정도로 혜린을 괴롭혀 왔다. 온라인에서의 공격도 혜린과 같은 반이었던 A양 주도로 이뤄졌다. A양은 대화가 잠잠해지면 “같이 갈구자괴롭히자”며 아이들을 부추겼다. A양이 어떻게 혜린의 성폭행 피해 사실을 알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성폭행 피해자였던 혜린을 걸레’라고 칭하며 욕을 했다.

A양은 심지어 또래들이 모인 페이스북 단체방에 다른 지역에 살고 있던 C양까지 불러들였다. C양이 학교를 다니는 지역은 혜린이 전학을 고려하고 있던 곳이었다. 혜린이, 너네 동네로 이사 간대. 애들한테 소문 좀 내줘. A양의 부탁에 C양은 동조했다. C양은 혜린에게 “개X같이 생겼다”며 혜린의 외모를 비하했고, “까불지 말고 싸가지 챙기고 댕겨. 여기 와도 받아줄 사람 없어”라고 퍼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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