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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서문 안쪽에 세워진 북관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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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북관대첩비 大捷碑
(2)1708년(숙종 34), 높이 187cm 복제품
(3)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 북평사인 정문부鄭文孚(1565~1624년)가의병을 모아 왜군을 크게 무찌른 것을 기념하려고 세운 승전비로, 함경도북평사로 부임한 최창대가 비문을 지어 숙종 34년(1708) 함경도 길주에 세웠다.1905년 러일전쟁 중 일본군이 비석을 발견해 일본으로 보내 버렸고, 도쿄야스쿠니 신사에 계속 방치되어 있었다. 1978년에 최서면 선생이 다시 비석을발견하면서 국내에 알려졌다. 그 후 우리 정부와 민간 단체들이 노력한 끝에북관대첩비를 2005년 10월 20일에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았고, 남북 합의에따라 2006년 3월 1일 북한에 인도되어 원래 있던 함경도 길주(현재 김책시)로되돌아갔다. 이 비석은 2006년 4월 25일에 북관대첩비 반환을 기념하여 세운복제비이다.
(4)<북관대첩비문 주요 내용>
(5)이듬해 정월에 단천에서 싸웠는데, 세 번 싸워 세 번 이기고 돌아와, 길주에 진을 치고 군사들을 쉬게하자, 청정(淸正, 가토 기요마사)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군대를 보내어 길주의 왜병을 구원하려 하자우리 군사들은 그 뒤를 쳐서 백탑에 이르러 크게 싸워 또 쳐부수었으며, 이 전쟁에서 이봉수, 허대성,이희당은 전사했으나, 적은 마침내 물러가 다시는 감히 북쪽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6)관찰사 윤탁연이 정문부가 절도사에게 알리지 않은 것에 화를 내며 의병의 공적이 자기보다 뛰어난 것을 시기하여 임금께 공로를 숨기고 거짓말로 아뢰었기 때문에 정문부에게는 포상이 시행되지 않았다.
(7)지금 임금(숙종) 경진년(1700)에 최창대가 북평사가 되어 의병의 자손들과 함께 연고지를 방문하여사적을 자세히 조사하고, 원통한 마음으로 여러 공신들의 기풍을 상상도 하고 또 임명, 쌍포를 찾아진치고 싸우던 자리를 거닐고 돌아보며 탄식하면서 떠나지 못하였다.
(8)* 임명, 쌍포: 일본군을 크게 이긴 격전지
(9)국립고궁박물관

임진왜란 중 함경도에 주둔중이던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를 대파한 정문부 장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함경도 길주에 세워진 북관대첩비.

원본은 당연히 북한에 있는데, 2000년대 남북관계가 좋았던 시절, 남북 합동발굴 및 연구를 통해서, 발굴한 원본의 탁본을 떠서 가져와 복제비를 세울수가 있었습니다.

만약 남북관계가 명바기, 근혜때나 지금 윤돼지 정권처럼 극악으로 치닫는 시기였다면 결코 이룰수 없는 일들이었던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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