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째 술마시던 호걸들의 진실

항아리째 술마시던 호걸들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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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켜 만든 양조주였다. 당시에는 여과 기술이 신통치 않아 술에 쌀 찌꺼기 같은 이물질이 들어 있는 탁한 술이었다. 게다가 살균 기술도 없었기 때문에 술에 다량 함유된 미생물로 인해 푸르스름한 빛깔을 띠었으며술 표면에는 흰개미처럼 생긴 부유물이 떠 있어서 ‘초록개미주라는 별칭도 있었다. 옛날 문학작품에 술을 ‘탁주라고 칭한 것도양조 기술이 발전하지 못해서였다. 이런 술은 쉽게 변질되었기 때문에당시 사람들은 술을 끓여서 마시곤 했다. 조조와 유비가 영웅을 논하면서 술을 데우는 장면이 있는데, 사실은 살균 중이었던 것이다.당나라 이전까지 사람들은 오늘날의 감주와 비슷한 알코올 1도 정도의 술을 마셨다. 반면 주점이나 양조장에서는 이물질을 많이 걸러내어 맑은 빛깔을 띠는 ‘청주를 팔았다. 이렇게 빚은 술을 움에 저장해두면 알코올 도수가 5도 정도까지 오르는데, 당시에는 이 정도만 되어도 아주 좋은 술이었다. 이백이 마신 술도 기껏해야 오늘날의 맥주와비슷한 5도 정도이니, 이백이 마신 한 말의 술은 맥주 4병 정도인 셈이다. 이 정도 주량은 헤이룽장에서는 고등학생 수준이다.
(2)송나라 때는 양조 기술이 조금 발전하여 알코올 도수가 10도 안팎으로 올라갔다. 무송이 마신 18사발의 술 도수도 기껏해야 그 수준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50도가 넘는 백주와 비교해보면 무송은 고량주500밀리리터쯤 마신 셈으로, 요즘 이 정도 주량이라면 꽤 대단한 수준이다. 하지만 무송의 고향인 산둥 지방에서 이 정도 주량을 지닌 사나이는 쌔고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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