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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전학 처분 취소 소송 판결문을 보면 정씨는 피해학생
(2)을 ‘돼지새끼’라고 지칭하면서 “더러우니까 꺼져라”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피해학생의 아버지가 제주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빨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3)이번엔 피해학생 측이 결정에 불복해 재심을 청구했는데, 당시 학교 측 교사는 “정군이 반성을 전혀 하고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아울러 “정군 부모님께서 책임을 인정하는 것을 되게 두려워 하신다. 2차 진술서는 부모님이 전부 코치해서 썼다”고 진술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 문제를 뛰어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됐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중산간 지대는 초토화의 참상을 겪었다. 11월 중순께부터 이듬 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중산간 지대에서 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4개월 동안 진행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방화되었고, 마을 자체가 없어져버린 이른 바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르게 된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를 병용하는 작전이 전개됐다.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한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고,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1949년 6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6 · 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희생되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 · 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그러니까 빨치산 몇 백 때문에 자국민 학살한 과거를 갖다가 빨갱이 어쩌고 한다?
사람 언저리 같지도 않은 짐승새끼네
https://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4400&sitePage=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1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