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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카스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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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저라는 정한 밀가루 한 되와 백설탕 두 근을 달걀 여덟 개로 반죽하여 구리 냄비에 담아 숯불로 색이 노랗게 되도록 익히되
대바늘로 구멍을 뚫어 불기운이 속까지 들어가게 하여 만들어 꺼내서 잘라 먹는데, 이것이 가장 상품이다”
이덕무가 남긴 <청정관전서, 1795>의 서술
이덕무는 스스로 인정할 정도의 단것 매니아였는데, 남긴 글 중에는 박제가가 같이 있을때 3번이나 단걸 먹었으면서 자기에게 주지도 않고, 자기가 선물받은 과자까지 몰래 뺏어 먹었다면서 친구에게 쟤좀 혼내달라고 하는 편지까지 남긴 적 있다.

청나라에 수행원으로 가서 천주당(교회)에 방문해 카스테라를 대접받은 이기지의 기록
서양인들이 나를 다른 방으로 맞아들여 앉도록 했다…… 식사를 대접하기에 이미 먹었다고 사양하니, 서양떡 서른 개를 내왔다.
그 모양이 우리나라의 박계(薄桂, 밀가루에 참기름과 꿀을 넣고 반죽해 직사각형으로 큼직하게 썰어 기름에 지진 조선의 과자로 한자로는 ‘중박계(中朴桂)’라고 쓴다)와 비슷했는데,
부드럽고 달았으며 입에 들어가자마자 녹았으니 참으로 기이한 맛이었다. 만드는 방법을 묻자, 사탕가루와 계란, 밀가루로 만든다고 했다.”

이외에도 조선시대의 카스테라 서술은 여럿 등장하는데 외국음식이라는 정체성과, 설탕과 밀가루가 둘다 사치품이였던 조선의 특성상 쉽게 먹을 수 없는 음식이였음.
그래선지 음차로 가수저라(加須底羅), 다르게는 설고(雪?)라고 불린 이 서양떡을 먹어본 사람들은 모두 극찬을 함.
최초로 카스테라를 도입한 일본에서도 오븐없이 만들 수 있다는 장점만 있었지 위 이유로 비싼 음식인건 마찬가지라 권력자들의 간식 아니면 외국 사신들의 대접용으로나 쓰였는데,
조선통신사들도 카스테라를 대접받았다는 기록이 있음. 간식중에서 가장 인기가 좋았으며 도중에 재정문제로 카스테라가 메뉴에서 사라지자 실망했는지 대접이 왜 이러냐며 삐쳤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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