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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지금처럼 강성 독재체제가 된 결정적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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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문

본래 6.25 이전까지만 해도 북한은 지금처럼 김씨부자를 지도자로 하는 조선로동당의 일당제이긴 했지만

실제로 당시 북한은 정치파벌이 여러개인 연립정부에 가까웠음

김씨부자들의 권력이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다는 말

당시 북한의 대표적인 당들은

만주파

당시 표면적으로는 북한을 지배하고 있던 만주파

여기 소속이 지금 북한에서 구국의 영웅이라고 칭송받는

김일성, 김책, 강건, 최용건 등이였음

김광협이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1970년에 김일성에 반대 깃발들고 숙청당함

갑산파

박금철, 리효순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얘네는 거의 만주파의 일부와 같았음

연안파

김두붕, 허정숙, 김무정, 박일우, 방호산 등 항일 전쟁과 국공내전을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인 계파

1930년대부터 조선의용군 등으로 활동하면서 중국 공산당과 지속적으로 연결되었었던 파였음

6.25 전쟁과 8월 종파사건을 통해 주요 인물들이 대거 숙청당함

소련파

박창옥, 허가이, 남일 등으로 구성되었던 소련 출신 파

1956년 2월 스탈린 개인 숭배를 비판한 소련 공산당 제 20차 대회를 계기로

연안파랑 함께 김일성을 비판하며 김일성과 싸웠으나 패배하며 전원 숙청당함

남로당파

그 유명한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파

박헌영, 김상룡, 리강국, 리승엽, 허헌 등 일제강점기 당시 서울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모였던 파

1949년 조선로동당으로 신설 합병됨

1953년부터 본격적으로 숙청되기 시작함

박헌영은 1956년or1957년 사형당함

이렇게 많은 정치 계파들이 있었음

그래서인지 1950년대 초까지만 해도 김일성의 권력은 1960년대 이후만큼 강하지 않았음

그러던 1956년

당시 소련의 권력자였던 흐루쇼프가 소련내에 있던 스탈린 신격화를 비판하는 일이 발생함

이를 계기로 북한내에서는 1956년 4월에 예정되어 있었던 조선로동당 제3차 전당대회에서 김일성이 개인숭배를 하지 말라고

하지 않을까?라는 여론이 많았다고 함

그런데 엉뚱하게도 3차 전당대회에서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개인숭배에 대한 책임을 모조리 뒤집어 씌우게 됨

결국 이를 계기로 김일성 반대파들이 반김일성 운동을 시작했고

김일성이 소련, 동유럽 순방을 위해 북한을 잠시 떠나자

소련파와 연안파가 김일성 내각의 실각을 위해 손을 잡음

그렇게 북한 내에서 반김일성 세력이 활기치기 시작할 무렵

바로 최용건이라는 사람이 이 모든걸 보고 들은 후 김일성에게 보고함

이를 듣고 계획을 세운 김일성은 이후 열린 8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참석했고

오히려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역공을 펼치며 반김일성파들을 꺽어버리게 됨

여기서 반김일성 파들은 여론을 자신들 쪽으로 완전히 가지고 오지 못하게 되었고,

윤공흠 같은 사람들은 김일성 찬양파들에 의해 단상에서 끌려 내려오게 됨

결국 윤공흠, 서휘 등 연안파 인사들은 회의장을 빠져나와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신의주로 향함

결국 8월 종파사건은 김일성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되었고,

김일성은 이후 자신에게 반기를 든, 반기를 들 것 같은 모든 사람들을 숙청시켜버림

김일성 승리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최용건은 명목상 북한 2인자인 부주석까지 오르게 됨

그리고 1976년 사망했고, 김일성이 직접 장의위원장이 되어 최용건의 장례를 치루어줌

여담이지만 최용건의 와이프는 2007년 중국에서 사망했는데, 당시 김정일이 조화를 보내주었다고 전해짐

이렇게 북한 역사상 최대의 반김일성 반대 운동은 김일성의 승리로 끝이 나면서

지금처럼 김씨 부자들의 독재 체제가 완성됨

김정일도 그랬고 김정은도 그렇고 자기 부모를 닮아서 그런지 김일성처럼 자기한테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것 같으면

일단 죽이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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