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렁쇠 소년’이 88 서울 올림픽의 상징이자 레전드로 남은 이유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굴렁쇠 소년’
이 ‘굴렁쇠 소년’은 아직까지도 88 서울올림픽의
상징으로 남아있음.
3시간이 넘는 개막식에서 이 굴렁쇠 소년이 등장한 장면은 단 ‘1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굴렁쇠 소년이 명장면으로 회자되는 이유는
바로 ‘적막’
1988년 9월 17일 오후 1시 10분, 전세계의 시선이
대한민국 서울에 쏠려 있던 바로 그 순간,
개막식이 2시간 정도 지난 시점에
텅 빈 잠실 주경기장이 멀리서 보이고,
약 10초간의 정적이 흘렀음.
그때 어디선가 ‘삐이~’하는 고음의 이명소리가 들려오더니 대각선 끝에서 손톱만한 흰점이 나타남.
바로 굴렁쇠 소년.
특별한 음악이나 안무 없이 큰 운동장을 한명의 작은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며 가로질러갔다.
한가운데에 다다른 소년은 멈춰서서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화려한 개막식 공연 사이, 적막속에서 등장한 굴렁쇠 소년의 1분은 당시 한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왜?
냉전시대의 끝자락, 서울올림픽은 소련과 미국으로 상징되는 동서 진영이 모두 참가한 말 그대로 평화를 상징하는 올림픽이었는데
소년이 등장해 굴렁쇠를 굴리고, 손을 흔들어 보이는 모습이 말 그대로 ‘평화’ 그 자체 임을 누구나 알 수 있었기 때문임.
또 당시 이 적막과 단 한명의 소년이 등장하는 퍼포먼스는 올림픽 사상 전례가 없는 획기적인 기획이었음.
이 기획은 우연일까?
서울 올림픽 개·폐막식의 총괄기획을 맡은 이어령은
확실한 의도와 그림을 가지고 이 기획을 했음.
이 굴렁쇠 소년과 관련된 몇가지 이야기들..
– 이어령은 굴렁쇠 소년을 반드시 1981년 9월 30일에 태어난 아이로 선출하려고 했다. 바로 1981년 9월 30일이 독일 바덴바덴에서 서울 올림픽의 개최가 발표 되었기 때문. 굴렁쇠 소년 윤태웅군이 바로 그날 태어났다.
– 당시 세계적으로 알려진 한국의 이미지는 ‘전쟁 고아’의 이미지 였다. 실제로 언론과 퓰리처상 수상작 등에 단골 소재로 한국의 전쟁 고아들이 등장했음. 이어령은 이러한 이미지를 깨부수고 싶었기 때문에 평화롭고, 활기찬 아이의 퍼포먼스를 준비한 것.
– 굴렁쇠의 동그란 ‘원’은 서양의 직선과 대비되는 동양의 원을 표현한 것이면서, 오륜기의 원, 지구, 나아가 미래의 한국을 돌리는 의미로 선택하게 되었다.
– 당시 이 기획은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다. 마지막 까지 반대가 심했으나 이어령이 총괄 감독으로 전권이 있었기 때문에 강력하게 밀어 붙였다고.
– 보통 올림픽의 개·폐막식은 무대감독이나 영화감독들이 맡지만, 이어령은 무대연출 비슷한 것도 해본 적없는 인문학자였다. 다만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신선하고, 철학을 담은 개막식을 만들 수 있었다.
– 이어령은 어렸을 때 굴렁쇠를 굴리다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다.
– 이어령은 엄청나게 디테일하게 개막식을 준비했다. 굴렁쇠 소년이 사라진 후 등장하는 어린아이들이 입은 옷도 정확한 색을 찾기 위해 3번이나 다시 제작했다고 한다.
– 굴렁쇠 소년 장면을 원거리에서 시작해 꼬마를 향해 점점 클로즈업 하다 다시 원거리 앵글로 바꾸는 카메라 워킹도 이어령의 주문이다. 국내 방송은 물론 미국 ABC에도 이 같이 주문했다.
– 이 ‘정적’을 기획한 이유는 전쟁과 냉전 같은 ‘시끄러운 어른들의 세상’을 ‘정적’을 통해 평화를 향해 가자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한다.
– ‘삐이~’하는 소리는 방송사고가 아니라 ‘정적’을 청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ㄷㄷㄷ)
– 프랑스의 저명한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는 이 굴렁쇠 소년 퍼포먼스를 행위예술 그 자체였다고 극찬했다. 실제로 이 외에도 수 많은 나라에서 굴렁쇠 소년은 88올림픽 관련 방송의 대표 이미지로 사용 되었다.
– 김영태 시인은 굴렁쇠 소년 퍼포먼스에 대해 종이가 아니라 잔디밭 위에 쓴 ‘일행시(一行詩)’ 라고 평했다.
– 굴렁쇠 소년이 얼마나 인상적이였나면, 이후 올림픽에서 굴렁쇠 소년 퍼포먼스에서 영감받은 퍼포먼스가 꾸준히 등장했음(실제 올림픽 기획자들도 언급)
윤태웅 군은 연극배우 활동을 한 뒤, 연예계에 데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