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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중동갈등의 역사 (스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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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중동갈등의 역사

1. 밸포어 선언(Balfore Declaration 1917년)
천재 화학자로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던 하임 와이즈만(1874-1952)의 공로로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 역사가 그려집니다
와이즈만은 고국 러시아의 유태인 박해를 피해서 영국 왕실 과학 협회에서 일하게 됩니다.
그는 1차 세계 대전 당시 폭발물 제조의 주요 원료인 아세톤을 대량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함으로서
영국을 승전국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줍니다.
영국정부는 와이즈만에게 은혜를 갚고자 했을 때
와이즈만은 유태민족의 자주국가 설립을 소망했습니다.
영국이 그 제안을 받아들여 그당시 영국 통치령이었던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공동체를 인정하며
국제 사회에 공식적으로 지지한다고 선언 합니다(밸포어 선언 Balfore Declaration 1917년)
밸포어 선언으로 민족국가 건설의 희망을 갖고 유럽의 각지에서 1919년에서 1939년 사이에
지속적으로 귀환하기 시작합니다.
2. 영국정부의 백서
팔레스타인으로 유태인들이 대거 모이자 아랍인들의 폭동과 테러가 빈번해집니다.
이에 영국은 아랍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유태인 이민자 숫자를 억제하고 유태인들의 토지 구매를
제한하는 정부문서(영국정부의 백서 White Paper 1939)를 제출합니다.
이 정책은 1939년 이후 전유럽을 장악한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피해 망명을 하고자 했던
수많은 유태인들에게서 유일한 생존 기회를 박탈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대영제국도 이정책으로 유대민족 대학살을 묵인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해가 지지 않던 대영제국의 영화도 수평선 너머로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3. 유엔의 결의
2차 대전이 끝났지만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대학살 수용소에서 살아 남아 고향으로 돌아온
유태인들에게서 등을 돌렸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유태인 생존자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습니다.
팔레스타인 유태인 공동체만이 차별과 학대를 받지 않고 정착할 수 있는 유일한 터전이었습니다.
영국은 여전히 이주를 통제하려 했으나
유태인들은 대규모 불법 귀환을 단행 하면서 영국에 맞섰습니다.
결국 영국은 통제가 불가함을 알고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상정 합니다.
유엔 총회에서 1947년 11월 인구비례로 땅을 분할하여 할당하였으나 불리한 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럽의 대학살을 경험한 유태인들은 어떠한 조건 하에서도 안식처가 필요함을 절실히
깨닫고 경계선을 수락합니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테러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엔의 공식 결의에 따라
1945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정식 국가로 탄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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