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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예전 일본 유학을 했을 당시에 도시마다 소각장(청소공장이라고 함)이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청소공장이라 부르는 시설인데 견학도 받아주더라고요. 도쿄 23구 내에서는 무려 20여개의 청소공장이 있습니다.
저는 도쿄에만 이렇게나 많은 청소공장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찾아보니 일본의 고도성장기 시절 많은 폐기물이 발생했고 주민갈등과 도쿄 도의 강력한 중재, 피해 주민들의 강력한 행동 등 ‘도쿄 쓰레기 전쟁’ 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과격했었나 봅니다.
(후술하겠지만 해당 지역 주민들이 쓰레기차 진입로를 차단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옆 나라에서 겪었던 갈등이 우리나라에 안 생길거란 법은 없겠지요. 더 큰 상황으로 치닫기 전에 사례를 참고하여 지금이라도 대비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아래 내용은 제가 도쿄 쓰레기 전쟁(東京ゴミ)의 위키피디아 글을 읽고 정리한 것이며 일부 의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1950년대 중반, 일본은 고도경제성장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소득배증계획 아래 생활 방식은 빠르게 바뀌고,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가 일상이 됩니다. 그 결과 쓰레기 발생량은 폭증하고, 유해 폐기물까지 늘어나면서 기존의 처리 체계가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최종 처분장은 빠르게 포화되고, 소각 시설에서 나오는 매연 문제까지 겹치면서 쓰레기 문제는 더 이상 뒤로 미룰 수 없는 도시 문제로 떠오르게 됩니다.
당시 도쿄 23개 구의 쓰레기 행정은 도쿄도 청소국이 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이 되자 특별구 내 육상 매립지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고, 결국 도쿄만을 매립하는 방식으로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문제는 쓰레기 양이 너무 빠르게 늘어 소각 시설의 처리 능력이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 시기 전체 쓰레기의 약 70%가 아무런 처리도 거치지 않은 채 그대로 매립되고 있었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고토구로 쏠리게 됩니다.
유메노시마와 신 유메노시마 같은 매립지에는 처리되지 않은 쓰레기가 쌓였고, 악취와 파리, 화재가 일상이 됩니다. 하루 수천 대의 쓰레기 차량이 고토구를 오가며 주민들의 생활 환경은 급격히 악화됩니다. 언론은 이 참혹한 상황을 집중 보도했고, ‘유메노시마 = 쓰레기 섬’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전국에 퍼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토구의 불만은 점점 폭발 직전으로 치닫게 됩니다. 결국 1971년 9월, 고토구 의회는 다른 구의 쓰레기 반입에 반대하는 결의를 채택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도쿄도와 나머지 22개 구에 “각 구가 자기 구 안에 쓰레기 처리 시설을 갖는 원칙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라는 공개 질의서를 보내게 됩니다. 답변이 미흡할 경우 실제로 쓰레기 반입을 막겠다는 초강수까지 꺼내 들게 됩니다.
이 사태를 계기로 당시 도쿄도지사였던 미노베 료키치는 도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쓰레기 전쟁’을 선언하게 됩니다.
도쿄도는 모든 구에 청소공장을 건설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이를 위한 10년 계획을 추진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 건설 단계로 들어가자 주민 반대는 거셌습니다. 특히 스기나미구 다카이도 지역을 둘러싼 갈등은 극단으로 치닫게 됩니다. 사전 협의 없이 부지가 정해졌다는 이유로 주민들은 강하게 반발했고, 회의가 무산되거나 공사가 물리적으로 저지되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연말연시 쓰레기 증가에 대비해 임시 집적소를 설치하려던 계획마저 주민 저항으로 좌절되자, 고토구는 다시 한 번 행동에 나섭니다. 스기나미구에서 나오는 쓰레기의 고토구 반입을 실제로 차단해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스기나미구에는 수거되지 않은 쓰레기가 거리 곳곳에 쌓이게 되고, 악취와 해충 문제가 빠르게 확산됩니다. 이 장면은 언론을 통해 전국으로 보도되며, 쓰레기 문제가 얼마나 현실적인 위기인지를 모두에게 각인시키게 됩니다.
이후에도 반입 차단과 해제, 회의 파행과 재개, 주민 반발과 행정의 강경 대응이 반복되며 갈등은 수년간 이어지게 됩니다. 결국 도쿄도는 다시 다카이도 지역을 청소공장 부지로 확정하고, 강제 수용 절차까지 검토하게 됩니다. 법적 다툼 끝에 1974년 전면적인 화해가 성립되고, 스기나미 청소공장은 1978년에 착공해 1982년에 가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도쿄의 쓰레기 문제는 주민 설득이 잘돼서 해결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도시가 마비 직전까지 몰린 끝에, 갈등과 충돌을 겪으며 제도와 원칙을 만들어낸 과정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쓰레기는 나온 곳에서 처리한다”는 원칙이 도쿄 전체에 뿌리내리게 됩니다.
서울의 난지도 역시 도쿄의 유메노시마와 매우 닮은 출발을 합니다.
급격한 도시 성장 속에서 쓰레기가 폭증했고, 이를 감당할 공간이 필요해지면서 한 지역에 부담을 몰아주게 됩니다. 난지도는 서울 전역의 쓰레기를 받아내는 최종 처분장이 되었고, 악취와 침출수, 화재와 위생 문제로 주민들의 삶은 극단적으로 악화됩니다. 이 지점까지는 도쿄의 고토구와 거의 동일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후의 대응은 상당히 달라지게 됩니다.
도쿄는 고토구의 반발을 계기로 쓰레기 문제를 도시 전체의 문제로 끌어올리게 됩니다. 고토구가 쓰레기 반입을 막아버리자 도시는 실제로 마비 위기에 처하게 되고, 그제서야 “이 문제를 특정 지역에 떠넘겨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됩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각 구가 자기 구의 쓰레기를 처리한다’는 원칙입니다. 이 원칙은 주민 합의의 산물이기보다는, 도시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정치적 결단에 가깝습니다.
반면 서울은 난지도를 닫는 것으로 문제를 마무리합니다. 난지도는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생태공원으로 재탄생했고, 이는 환경 복원과 상징성 측면에서는 분명 성공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쓰레기 처리 구조 자체는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문제의 중심을 ‘도시 내부’에서 ‘도시 외부’로 옮기는 방식, 즉 수도권 매립지에 대한 의존이 계속 유지됩니다.
저는 도쿄 쓰레기 전쟁의 과정을 보면서 이 일들이 우리나라에도 일어날 것이라는 불길한 기운이 듭니다. 물론 이 또한 성장통으로 받아들이고 더 나은 우리나라가 될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겠지요. 그래도 더 나아질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