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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한중록에 사도세자가 죽였다고 기록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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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채(내관)

1757년에는 갈아입은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내관 김한채의 목을 베어 그것을 들고 돌아다님.

이 날 세자는 김한채를 포함하여 6명의 내관을 죽였다고 함.

김한채는

사도세자

에게 살해당한 후 시신이 훼손되었으며,

는 김한채의 목을 들고다니며 궁녀와 혜경궁에게 보여줌

혜경궁은 이 모습을 보고 너무 무서웠다고 적음

경빈 박씨(박빙애, 궁녀출신인 사소세자의 후궁)

1761년엔 자신의 후궁 빙애(경빈 박씨)를 손으로 때려죽이고, 둘 사이에 난 아들 은전군을 연못에 던져버림.

다행히 아기는 연잎에 얹혔고 시중들이 급히 건져내어 목숨을 건지게 됨.

서경달(내수사 관리)

물품을 늦게 가져왔다고

에게 죽임을 당함

유인석(내관)

가 몰래 유람 갔을 당시에 세자가 자리에 있는것처럼 은폐해준 내관인데

그외

친모 영빈 이씨의 내인 죽임

점친 게 맘에 안든다고 맹인 점쟁이 죽임

1760년에는 세자빈인 혜경궁 홍씨에게 바둑판을 던져 눈알이 빠질 뻔할 정도로 다치게 함

이후에는

세자는 단순히 죽이는 것에 끝나지 않음.

궁녀 뿐만 아니라 비구니들을 잡아다가 때리고 성폭행했는데 때려서 피투성이가 된 궁녀와 성관계를 대놓고 했다고 함.

또한 인두로 고문도 했는데 이는 영조가 재위 초반에 너무 잔혹하다며 금지한 형벌이었음.

그밖에 유람과 사치에 열중했다고 하는데 내관을 자신으로 연기시켜 놓고 영조도 모르게 평안도 유람을 나간 적도 있었음. (왕족이 왕의 허락 없이 도성 밖을 함부로 나서는 건 당시로선 있을 수 없는 관례였음.)

그렇게 유람이나 도성 밖 행차를 했는데 그 와중에 부녀자를 집단강간하거나 백성들의 금품을 갈취하거나 이유없이 때려죽이는 일도 있었다고 함.

또한 연회나 하사품 구입으로 세자궁 예산이 바닥나 시전 장인들에게 돈을 빌렸다가 나중에 영조가 알게 되어 국고로 메꿔 준 일도 있다고 함.

한중록과 대천록(정조가

사건에 대한 일을 정리한 책)에 따르면

가 이렇게 죽인 사람의 수가 백여명에 달한다고 나와 있음.

또한 정조의 요청으로 승정원일기에서

의 행동이 100여 곳 이상 빠지고 세초됨.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기록이 이정도니 실제로는

가 입힌 피해가 그보다 더 많았을 것임

영조가 자식을 지나치게 학대하고 모질게 굴어서 자식이 엇나가버린건 맞는데

그 엇나간게 너무 과해서 연쇄살인마 유영철 처럼 되어버림.

그 유영철이 살아서 왕이 되거나 또는 왕(정조)의 아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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