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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임진왜란 미참전이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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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지방(현 일본 수도권)은 호조 가문의 영지였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멸망당하고 옆동네 중부지방의 영주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관동지방의 영주로 임명됩니다.

영지가 더 늘어난 승진이었지만, 실제로는 도요토미의 숙청 리스트에 올라간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도요토미는 공신들을 승진시켰다가 나중에 민란 등을 구실로 토사구팽하곤 했거든요.

특히 관동지방은 지금에야 일본의 수도권이지만, 저 당시는 척박하고 거주민들 성격도 빡센 변방 이미지였습니다. 일본의 시작은 서부 지역이고, 중심지는 계속 관서지방이었으니까요.

심지어 이런 이미지는 이미 도쿄가 일본 최대도시였던 19세기 중반까지도 이어집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이 있는 수도를 교토에서 에도로 옮긴다는 의견이 나왔을 때 ‘어찌 폐하를 그런 척박하고 험한 변방으로 가라고 하냐’는 말까지 나왔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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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마에 섬
히비야 만
(구) 에도마에 섬
(구) 히비야 만
에도 성
(현 항거)
에도 성
(현 항거)

당시 관동지방의 중심지는 도쿄 남부지억의 가나가외현에 있는 가마쿠라나 그 일대였는데요, 도쿠가와는 엉뚱하게도 자신의 성을 에도성으로 합니다. 에도는 그 당시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시골마을이었고, 작은 에도성 하나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쿠가와는 이 에도성 앞 만을 간척하고 도시를 세웁니다. 이 간척지가 지금 도쿄역이 있는 마루노우치 등이며, 이것이 현대 도쿄라는 도시의 시작입니다.

도쿠가와는 바다를 따라 동북지방으로 향하는 에도가 미래 교통의 거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기존 대도시가 아닌 이곳을 개발하기로 결정한 것이죠.

심지어 도쿠가와가 전국시대 최종 승리자가 되는 계기가 됩니다.

모든 영주들은 도요토미의 명령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하면서 많은 재산과 인구를 잃고 결국 세력이 약화되는데, 당시 도쿠가와도 조선 출병 명령을 받았으나 ‘여긴 조선이랑 너무 멀고, 아시다시피 여기 사람들이 워낙 빡세서 여유가 없네요ㅜㅜ‘라는 현실적인 핑계를 대며 출병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영주들의 재산과 병사들이 갈려나가는 사이, 도쿠가와는 열심히 에도를 개발하고 땅을 간척하며 엄청난 재산을 쌓았고 이것은 도요토미 사후 도쿠가와가 천하를 호령하여 에도막부가 열리는 것은 물론 현대 일본의 수도가 도쿄가 되는 계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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