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ter by 카테고리

“”””일제강점기 가장 많이 허가된 출판물은 족보””””

()

이미지 텍스트 확인

정 국원 종공신 (숲뼈 [료#I] E) 녹권 (쓸 축)상
노(#)로 기록된 성씨 #채f
X1L
정R원하중심
상대o마위
2000불Q복-비율
186냉
IUUUva
45,985,UUU냉
IUUUvdl
(UI) 김(#)씨
35냉
18.8v6
9,926,UOU냉
21.57
(02) 박(자)씨
’25냉
13.476
3,895,UUU냉
8.5v히
(03) 이숲)씨
’22냉
11.8v6
(95,UUU냉
14. (V6
(04) 상(앞)씨
8냉
4.3v6
919,UUU냉
2.5v61
(05) 죄(C)씨
3.876
오40000명
4.(v
(U6) 눈(#)씨
3.8v6
949,UUU냉
2.U7dI
오0 홍어씨
519,UOU냉
1.1V6
(08) 두(꽤)새
603,UUU냉
1.3v61
(Ug) 한(부후)씨
(04,UUU냉
1.57
(1U) 성(뱃)새
2,UIU,UUU냉
4.3v61
(11) 소#)씨
985,UUU냉
2.1%
(12) 자(부)씨
2.2v6
180,UUU냉
U.4v히1
(13) 서()씨
1.6vd
694,UUU냉
1.59
(14) 뉴(체)씨
1.6v6
32
243,UUU냉
U.5v히1
(p 안(엿씨
1.6v6
638,UOU냉
1.4V6
(16) 백(비)씨
1.6v6
’28
351,UUU냉
U.(vd
(11) 고(실)씨
1.6v6
22
436,UUU냉
U.9v6
‘]블
149넣
8U.176
32,U1 {,UUU냉
69.6v1
나내시 30개표
3(냉
19.9v6
13,968,UUU냉
3U.4y히
(햇로거복최#,은성)
U냉
UUva

이미지 텍스트 확인

*tL
양물원중중심
상00 위
2000년
433냉
IUUUa
45,985,UUU냉
IUUUva
(U1) 침(숲)새
86냉
19.9v6
9,926,UUU냉
21.5v0
(02) 이(숙)새
6(냉
15.5v0
6,(95,UUU냉
14. (v6
(03) 박(자)씨
3U1
6.9v6
3,895,UUU냉
8.5v6
(04) 죄(표)씨
’21냉
4.8v6
2,1(U,UUU냉
4.(v6
(U5) 성(뱃)새
19냉
4.476
2,UIU,UUU냉
4.3v6
(U6) 상(축)새
12냉
2.8v0
1,044,UU)U냉
2.3v6
(U() 소#)씨
12냉
2.8v6
985,UUU냉
2.1v6
(08) 눈(#)새
1U냉
2.3v6
949,UUU냉
2.Uva
(Ug) 모낮)씨
9냉
2.171
(U6 UUU냉
1.5v6
(IU) 한(부부)씨
8냉
1.8v6
{04,UUU냉
1.5v6
(11) 서() 씨
1.8v6
694,UUU냉
1.5v6
(12) 상(요)씨
1.6v6
919,UUU냉
2.57
(13) 손()씨
1.6v6
415,UUU냉
U.9va
(14) 임(K)새
1.4v6

(63,UU)U냉
1.(v6
(15) 흥시표) 씨
1.4v히1
20
519,UUU냉
1.1v6
(16) 자(부)씨
1.4v6
180,UUU냉
U.4v6
(11) 뉴(제) 씨
1.476
32
243,UUU냉
U.5v6
(18) 반(국)씨
6냉
1.4v6
638,UUU냉
1.4v6
(19) 백(비)씨
6냉
1.4v6
28
351,UUU냉
U. {v6
소 계
332냉
(6. (v6
33,9U6 UUU냉
13.1
나버시 딴
101냉
‘23.3v61
2,U(9,UUU냉
26.3vd
((햇로거복최*감은성_
U냉
UUva
#l불버름

“”일제강점기 가장 많이 허가된 출판물은 족보””

1920년대와 1930년대 가장 많이 허가된 출판물은 족보였다. 1920년대 출판 허가를 받은

출판물 1만 807건 가운데 족보는 1천358건으로 12.6%를 차지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6086830

조선 후기에 족보를 많이 만들면서 신분세탁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족보는 일제강점기때에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족보를 만들어서 신분세탁이 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리고 애초부터 양반은 사무라이와 같은 공식적인 신분이 아니라 관념적인 개념입니다.

요즘으로치면 상류층 같은 뜻입니다.

1507년 정국원종공신과 1728년 양무원종공신의 성씨 분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신에 책봉되어서 당시의 성씨 현황을 알 수 있는데

1507년에도 현재와 유사하지만 1728년에는 현재와 동일한 상황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당연히 성인이라 태어난 시기로는 17세기(1600년대)에 성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 중기에 성의 보급을 알 수 있습니다.

성의 보급과 본관의 보급, 그리고 족보의 보급은 시기가 다릅니다.

성은 조선 전기에 대부분 보급되었고 중기에 완료되었으며,

본관은 이전부터 있었던 일부 상류층을 제외한 하층민들은 조선 중기에

동시다발적으로 보급되었습니다.

그리고 족보는 선입견과는 달리 조선시대에는 족보세탁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일제강점기에 족보를 만들면서 족보세탁을 하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인쇄술의 발달과는 별개로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집안 족보를 조작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조선 말기에나 성이 보급되었다거나 조선시대에 족보로 양반을 사칭했다는 식은

일본 극우들이나 친일파들이 지어낸 얘기입니다.

족보로 양반을 사칭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우며 당시에도 극소수의 사례만 있습니다.

현재와는 달리 조선시대에는 자신의 고을에 양반이 누가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간혹 외지인이 양반을 사칭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들킬 수 밖에 없습니다.

양반 사칭이라거나 양반이 붕괴되었다거나 하는 식의 주장은

조선은 일제가 아니더라도 망한다는 식의 식민사학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성인 김해김씨가 조선시대에는 별볼일 없는 집안이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 후기에 유명한 성을 하층민들이 따라했다’는 것이 허황된 주장입니다.

이 게시물은 얼마나 유용했습니까?

별을 클릭하여 등급을 매깁니다!

평균 평점 / 5. 투표 수:

지금까지 투표가 없습니다! 이 게시물을 평가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되세요.

리플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