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 텍스트 확인
일제는 조선올 일본과 동화시키려는 일환으로 1920년대 ‘내선결
혼’올 추진함
골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결혼하는 가정이 많이 생기면 우리가
구태여 교육하지 않아도 알아서 동화되지 안올까?’ 라는 취지엿음
1921년, 조선인-일본인과의 결혼올 합법화 하여고
내선결혼올 일본;에서 장려하기 시작합.
그러나 몇년뒤 동계록 보고 조선충독부는 당황하기 시작하는데._
일본인 남편
이미지 텍스트 확인
조선인 아내
조선인 남편 ; 일본인 아내
IJ9년
ZS
29
929년
277
의래년
표
390
1931년
367
932년
364
933년
02g
377
934년
602
365
933년
039
6OI
391
1933녀
213
625
1937녀
1206
66A
생각외로 조선인 남편-일본인 아내 조합이 많이 생격다는 것
당연히 시대가 시대인지라 일본인 남편-조선인 아내 조합이 대부
분일거라고 추춧햇지만
예상외의 결과엿음.
심치어 일남-조녀 커플의 경우
대부분 일본인이 조선에 정착하여 현지에서 처률 들인 경우없지
후자는 일본으로 유학울 가거나 일자리블 구하러 갖당 조선인이
일너량 만나 결혼하는 사례가 반번햇기 때문에
오히려 일본인이 시집오러 한반도로 오는 현상이 일어낫음
조선이 일본에 동화되라고 내선결혼 정책올 펼쳐는데, 오히려 그
반대인 ‘역동화’ 현상이 일어나는 격
몇가지 사례틀 보자
이미지 텍스트 확인
조
불@
선
올
깜라
직
원
꿀
흙
(1926년 동아일보 기사)
-1926년 도교 우에노 음악학교 성악부률 졸업한 요시자와 나오코
논 같은 학교 출신인 김문보와 결혼햇고.
나오코는 조선의 며느리로 살컷다고 다짐하여 조선으로 건너용
-1912년 경성에서 광산업올 하던 김형박 (30세)은 같은 업에 종사
하면 하마다씨의 딸 하마다 후구(16세) 와 결혼
~한명의논 10세 때 부친올 잃고 미장일올 배위 일본으로 건너갖
이미지 텍스트 확인
다.
모시면 일본인 직인에게 솜씨름 인정받아 1932년에 그 외동딸 다
치 소노에와 결혼
-1927년 메이지대학생 서원록은 도교역에서 무라카미 하루에게
우산을 발처준 인연으로 연애, 하루는 가출하여 서원록과 동거햇다.
하루의 부친은 경찰에 신고하여 1년 만에 서원록올 체포하엿는데, 그
때서야 서원록이 조선인임이 밝혀젓다.
하루는 임신한 몸이라 부친의 반대에도 결혼올 결심하여 조선에 앞는
데, 알고보니 서원혹은 이미 처자식이 있없다.
하루는 충격으로 유산을 햇다.
시아버지와 남편은 접을 두는 것은 조선의 풍습이라 설득, 결국 하루
논 청이 되어 조선에서 살앉다 .
~전문학교 교사엿다가 해방 후 문교부 차관까지 지번 S씨는 도교
유학 중 하숙집 딸 다카하시와 사귀며 하숙비률 내기논커p 그 집
에서 학비까지 내략는데
졸업하자 여자 버리고 귀국햇다.
(이 새끼가. )
-1911년 경성의 지성연은 의학전문학교 유학시절 사권 간호사 사
이미지 텍스트 확인
카모토 하루요와 조선에서 결혼하고 장모까지 모서와 함께 살앞
다.
보통 지배국의 남성이 피지배국의 여성올 전리품 마냥 가져가는
것이 역사적인 흐름이옆고
일제도 필히 그럴출 알앉다.
그러나 예상외의 결과가 나오자 당혹햇고
1928년엔 아예 어용단체인 상애회틀 중심으로 ‘내선결혼 소개
부’틀 신설하다
목적은 ‘일남-조녀’ 커플올 적극적으로 양성하는것
도교 혼조구에 본부름 문 상애회가 1928년에 내선결혼 소개부
이미지 텍스트 확인
틀 신설하자, “종래 내선결혼이라고 하면
거의 조선인 남자에게 내지인 여자가 시집가는 것으로 되어 F는
상애회에서는 선인여성으로 하여금 적극 내지인 남자에게 시집가
게 하기 위해 힘쓰다”고 보도되없다
일본 민중들의 시선도 그닥 곱지 않앉다.
제국주의 시대에 자국 여성이 자발적으로 식민지로 시집울 간다
논 것에 대한 강력한 거부감이 있없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내선일체’ 률 강조하던 일본 당국은 침묵하없지만, 민
중들은 때때로 공개적으로 적대감올 드러내곧 햇다.
“요즘 일본인 여자가 요보(조선인의 멸칭)의 부인이 되는 경향이
이미지 텍스트 확인
엎는데 뭐가 좋아서 요보의 부인이 되는 건지 정말 바보 같은 이야
기다.
요보의 부인이 월 바에야 차라리 창너라도 되는 게 낫지 않은가?”
(거 시발 참.. )
-경성의 어느 중국요리점에서 일본인 손님이 한 발언
“MS “
사구 438 제소사
“ye 건수
“리가다 소설저기;
그러나 이런것도 무색하게, 2차대전이 일어나서 일본에 남성들이
부족해지자
‘조남일녀 커풀’ 의 수는 가파르게 증가햇고
1942년엔 조남일녀 조합이 일남조녀 조함의 무려 10배률 상회햇
세계 식민지사에서도 유래가 없는 일로
지금도 왜 그런 현상이 일어넷논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따로 존
재하지 안듣다.
다만 일본혹은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본래 지도 또는 정복 민족의 남자가 피지도 또는 피정복 민족의
여자루 처로 삼논 것이 지배관계의 원칙이지만 내지에서 이 관계
눈반대..
내지에 거주하는 조선인이 대부분 조선의 하증민임에도 불구하고
지도민주인 내지인 여자와 성관계률 맺는 경우가 망은 것은
한편으로는 내지인 여자름 처로 삼음으로씨 정복감올 만족하는
데 있는 것 .
내지인 여자가 조선인의 성정올 알지 못하고 그들올 내지인으로
오인하거나 또는 그 감언에 속아서 자포자기의 상태가 되는 것올
나타넘다
대동아건설민족인구자료 14: 내지재주 조선인 출산력 조사연구-
한마디로 일본여자가 조선남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조선으로 시집
갖다는 것
물론 적혀있는 사례들 보면 조선인인출 모르고 연애 햇다가 결혼
한 경우도 간간히 보이곤 한다.
그러나 일년에 맘계는 1400건까지 있는 결혼 모두가 그렇다고 말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무엇 때문에 일분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선에 시집울 앞율까?
그건 당사자들만이 알 일이다
출저-국역 조선종독부 30년사-
~서울대학교 이정선- , 일제의 ‘7n#{름#’ 정책 , <동화와 배제-일제
의 동화정책과 내선결혼–
913096
이미지 텍스트 확인
“P”VVFAr새’
IIlyvu” ‘ Vrn
I GILSV
Suni 모’FiC_A
AvLtlGA
tAvAe
orsICFA
CuE 6
8
Iaooo
303313
Sr
480
5/lo
A
A’cLL
T
<12 .E9
P:ADa
ht
iLL
Js
WE
T7o
nossry
cLsu?p
73
na
NS
Cs
TML
osxt s
MIS
2u T
MCA
CoISCIPES
0Y
TRE
49S
VSR
Oes
m’rst
w
VL
UA
TNE
FiCwl
1n5′
CCA
60
YD
NaGEr
‘o3
6: ‘
OIeN
Pur
94
무=
5P
l Y
Cu’uiric
Yo
_
WVAL
O5
5A
m
‘HA
T너E
“A 벼WA S
스 MP
F
87 .
^”
{i'”’43’ ,한 ‘
AiT’trCJCLs
N
IY
원 – 조선인 노무자
오 – 일본군 파일럿
1943년 11월 20일, 미육군과 미해병대는 맥권 섬과 타라와 섬이
포함된 길버트 제도름 공격하여 탈환하엿다.
미군은 아틀 섬에 대한 공격에서 2명의 포로록 잡아 심문햇논데 ,
한 명은 조선인이없다. 그 조선인은 수천명의 동족들이 일본군에
의해 끌려와 노역자 대대에 속해있다고 얘기하엿다.
오른쪽의 일본인도 “나도 조선인이다 “라고 하여으나 왼쪽의 조선
인이 손사래들 치여 “거짓말이다. 이놈은 쪽바리다”라고 알려주엇
다. 결국 일본인은 일본육군 항공대 파일럿 신분이없다는게 밝혀
젖다.
Jn
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