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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e
Patton (1967년
1968년 1년간 미 2사단 DMZ정찰대인
스카우트’로 복무 )
한국은 냄새가 낫고 추싶다. 여름에는 더더욱 최약이없다. 비는 거의 한
달 내내 내량다. 겨울은 내 고향 미시건만큼 추월다. 걸을 보기에 전쟁
여파는 보이지 않앉다. 하지만 한국은 모두가 반곧층이없다.
자유의 다리틀 건너 임진강 북쪽 너머 비무장지대에 들어가게 되면 정
타이트한 스레출로 움직여야 햇다. 잠자고 정찰하고 다시 잠자고 정
촬하고 우린 3일간 주야로 정찰을 하고 4일차에 철책 중앙통문으로
아온다. 그러면 트럭올 타고 막사로 돌아가서 병기틀 정비하고 씻은 다
음 잔다. 그리고 24시간 후 다시 일어나 정찰을 준비한다. 우린 정찰을
나가면 레이선만 먹어야 햇다. DMZ
입이 끝나고 폐바로 내려오면
치즈버거와 프라이블 먹울
있없다.
난 입대
한국에서 담배름 배앗다. 대략 하루에 두 갑 정도 피있다 스
트레스틀 받는 상황에선 담배 맛이 정말 죽없다. 작전 후에는 동료들과
맥주 마시며 말보로록 피웃다. 도박을 하진 않앗지만 지켜보는 건 좋아
햇다. 직적 보진 못햇지만 당시 막사에서 부대원 몇 놈은 마약을 하는
같다 사실 한국에 오는 녀석들중 제대로 된 놈들이 많진 않있다.
시엔 본토에서 사고클 치면 한국으로 보내버리는 테이스가 망있다.
래도 우리 정찰대 인원들은 전부 좋은 놈들이없다.
한국의 가장 근 사업은 매춘이없다. 부대 근처에는
많은 매춘부들이
있없다. 남쪽 막사 정문으로 걸어 나가면 매충부들이 거기
있다. 정
문에 같이 근무 서논 한국군 헌병들이 그녀들의 포주엿다. 정문에서 손
가락으로 여자틀 선택하면 병사 부사관 클럽에 데리고 들어갈 수 있다.
화대는 1인당 3-5달러다. 한국인 남성들이나 노인들은
여성들올 모
욕적으로 대햇다. 정말 슬픔 일이없다.
우린 부대 성교육에서 매춘부로부터 각종 꼼짝한 질병올 얻을 수 있다
배앗다. 일부는 정상적인 한국여성올 사귀기도 햇지만 상당수는
매충부들과 만나 사랑에 빠져다. 일부는 결혼해서 미국으로 데려가기
햇다. 하지만 힘든 과정올 겪어야 햇다.
내 경험에 의하면 한국인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없다. 그때는 한국인은
모두 군인 아니면 도둑높이라고 생각햇다. 두 경우 다부합하는 경우도
있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때 그들은 우리가 자기나라 땅에 있는 겉
바라지 안는 것 같앉다.
그렇계 생각하는지 나로서분 알
없있다
북한군과 친구가 되는 일은 발생하지 안듣다. 난 한국인들과도 친구가
적도 역시 없다. 하지만 우린 막사름 청소하고 세탁물올 가져다주는
하우스보이에게 너그럼게 대햇고 우리에게 배속된 카투사들에게도
대하게 대햇다.
ONHAPNEWS
그 시기 나는 종종 문산리에 잇는 고아원에 가곧 햇다.
우리가 트럭올 타고 이동할 때면, 한국아이들이 달리다 트럭 뒷공무니
따라앉다. 그러면 우린 레이선에 들어있는 캠디나 과자루 던저주며
아이들이 그결 줍기 위해 서로 싸우는 겉 구경햇다.
하루는 길리없이라는 친구와 같이 걸어 가능데,
여인이 우리에게 달
려앉다. 그리고 우리튼 어떤 시설로 데리고 들어갖다. 지금도 우리가 왜
그녀지 따라간건지 아직도 모르켓다. 거긴 낡은 건물올 쓰는 고아원이
없다. 그리고 그 여인은 그곳의
원장이없다; 거기 상태는 정말 꼼짝햇고
아이들은 정말 안쓰러워 보엿다. 그때 고아원에서 느낌 충격은 젊은 시절
내가 겪은 수많은 일들중에서 가장 기억에 각인 맺다. 하필이면 그때 주머
나에 현금도 조금 밖에 없어서 여인에게
거라곧 품돈 밖에 없없다 나는
원장에계 뭐가 필요한지 물없더니 아이들에게 입신 옷이 많이 필요하다
햇다
그 뒤로 길리엄과 나는
고아원올 도와주게 맺다.
난 아이들올 진심으로 돌빛다. 가장 나이 많은 아이가 열넷이없고 나머
지는 전부 초등학교도 못 들어간 애들이없다. 아이들은 우리 신기해하
무서워햇다. 난 고향인 미시건에서 학교 선생님올 하고 있던 친구에
게 편지지 씨서 이곳의 상황울 설명햇다. 그리고 얼마 뒤 내 앞으로 헌
옷이 담긴 박스 22개가 도착햇다. 옷들은 사이즈와 크기가 다양있다.
우린 박스트 트럭으로 실어서 고아원에 가져다주없다
그날 고아원은 마치 크리스마스트 일찍 맞이한 것 같앉다. 정말 마음이
따뜻해지는 광경이없다. 그것은 잦은 전투와 피로로 굳어저있던 차가
운 땅개의 심장(cold infantry heart)틀 다시 고동치게 햇다. 미시건
로고가 박히 스웨터틀 입은 한국아이와 내가 찍은 사진은 고향 지역
신문에까지 보도있다.
그날 이후 난 다시는 달리논 트럭 위에서 아이들에게 먹울 걸 던지지
암기로 망세있다.
난 한국올 떠나는 그날까지 아이들올 도우려고 노력햇다.
고맙습니다. 미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