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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하의
탄금대의미스터리Bst 7마지막 편
임진왜관
정예 l@o여명은로
떨 여떻제 해복수있어젯논가?
뉴스괜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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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2
임진_관최|미스무리
선꺼과 [람
타금대 전투
인생이
스다
조선군
일본군
정규군 100여명
정규군 18700여명
비정규군 8,000여명
김동원
일본군은 조송이 포함된 보병이 1만8전7백 명이없고요
미다_
조선은 제승방략이라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200년간 태평천국 시절이었습니다. 사실상 군인이라고 해봐야 북방의 소규모 약탈자들 막는 규모만 있으면 됩니다. (*제승방략 : 평소 농민들 농사 짓고 일정기간 군사 훈련해서, 비상시 주요 거점지역에 모이고, 한양에서 장수가 내려와 제승방략으로 모인 병력을 통솔)
제승방략은 그냥 지금으로 치면 민방위
제승방략으로 인근 농민들 수습하는데, 수습이 안되어서 겨우겨우 유성룡이나 주변 사람들이 모은 농민들과 충주로 내려가면서 모은 농민들 8천명을 데리고 일본군 최정예 1~2만명과 대치해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신립은 당시 일본군 규모도 모르고 진격로도 모르고 진격속도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제승방략으로 모집된 8천명은 무기도 대부분 스스로 들고와야 해서 변변한 무기도 없어요.
곡갱이니 죽창이니 이런거 들고오고, 진짜 거의 농민 그대로입니다.
2. 시간 싸움
신립을 비난 하는 사람이 전혀 모르고 있는게 있습니다. 바로 시간입니다. 임진왜란때 일본군은 고려를 쳐들어온 거란이나 병자호란의 청군처럼 그냥 속도전입니다. 뒤도 없이 오로지 한양만 보고 어택땅 찍었어요.
신립은 북방을 지키고 있다가, 갑자기 한양으로 호출되었고, 갑자기 농민들을 모아서 일본군을 막으라는 오더가 내려왔습니다.
이때 신립은 일본군과 어디서 만날지도 잘 모르고, 일본군이 얼마나 쳐들어왔는지, 어느 루트로 오는지, 언제 오는지도 잘 몰랐습니다.
* 일본군 상주 도착: 음력 4월 25일
* 신립 장군 충주 도착: 음력 4월 26일 ~ 27일 경
* 일본군 충주 (탄금대) 도착: 음력 4월 28일
사실상 신립과 일본군은 충주 도착시간이 거의 같습니다.
신립은 일본군이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남하했고, 일본군은 그냥 무조건 한양을 향해 여러 루트에서 북진했습니다.
그리고 제승방략으로 모집될 지역이 대구랑 상주인데, 제승방략으로 대구에 농민병들이 모여서 한양에서 온 장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양에서 장수가 오기전에 일본군이 먼저 도착해서 제승방략이 박살났어요.
그다음 지역은 상주인데, 상주는 이일인가
이때 신립은 그동안 북방에 있다가 갑자기 농민들 데리고 일본군 막으라고 하는거였고, 신립이 충주에 도착할 때 쯤 일본군도 이미 상주에 와서 충주로 오는 중이었습니다.
3. 조령(문경새재)를 막았어야 했다
신립을 가장 비난하는 부분이, 조령이라는 천하의 요세를 버리고, 탄금대라는 평지서 싸웠냐
일단 가장 중요한거는. 문경새재는 임진왜란 이후 지어진거구요. 임진왜란 당시 조령은 성벽이 없었습니다. 충주읍성 하나 있는데, 이거는 말이 성이지 사실상 수비 능력이 제로 수준입니다.
지금이야 문경새재라는 하나의 관문을 막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조령은 엄청나게 많은 갈림길이 있었고, 애초에 조령이 아니라 우회하는 길도 많았습니다.
또한 매복은 엄청나게 훈련된 정예병들이 펼치는 전술이지, 갓 소집되고, 적군에 대한 공포가 극심한 농민들이 펼칠수 있는 전술이 아닙니다.
안그래도 당시 조선 급조병들은 탈영이 문제였는데, 매복을 시켜놓으면, 거의 다 탈영을 하지, 일본군이 올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기습전술 절대 못 펼칩니다. 매복전술은 그냥 불가능해요.
1키로도 완주못하는 사람들한테 10키로를 30분안에 주파하라는 수준의 전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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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물 최미스터리
전저_[람_
타금대 전투
인생이 뉴스다
충주
조령
일본군
부산
‘머의소
또한, 조령을 막더라도, 엄청나게 많은 계곡중 어느 곳을 막아야 하나요
이런 상황에서 한두 계곡에 매복했는데, 일본군이 거기로 안오고 그냥 우회 해 버리면 어떻게 되나요
우리야 결과를 알고 봐서 그렇고, 일본군 규모도 알고 진격로를 알고 있어서 그런데, 저당시 신립은 일본군 규모도 모르고 진격로도 모르고 진격 속도도 모릅니다.
그냥 북방에 있다가 갑자기 농민들과 일본군 막으라고 하는데, 저때 충주에서 일본군과 싸울지, 상주에서 싸울지 이런것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일본군과 사실상 거의 같은 날 충주에 도착했는데
조령의 어느 골짜기에 매복을 해서 어떻게 일본군과 싸움이 될까요
그나마 자신과 싸워봤던 최정예 기병 80~100기들이 싸울 수 있고, 일본군이 무조건 지나가야 하며, 조선군들 탈영을 막을 수 있는 평지가 당시 신립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장소가 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물론, 저 당시엔 오합지졸이지만 8천명이나 되는 농민들이 몰살한 것은 비난 받을만 하죠. 앞서 상주나 대구 이런 곳에서는 제대로 싸우지도 않아서 저때 제승방략 병력들 대부분 생존해서 향후 의병이나 각종 게릴라 전투 경험으로 몇년뒤 최정예 병력으로 거듭나거든요.
이런 병력 8천이 몰살된건 총책임자의 잘못이 맞긴 한데요.
저당시 신립 상황이라면, 결과를 알고 있는 지금으로 봐도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고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