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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정지용에 버금가는 토속적인 서정시로 명성을 날렸던 민족시인 백석(白石·본명 백기행).1963년을 전후해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을 뿐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백석의 북한에서의 행적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90년대 중반부터 중국과 일본을 돌며 백석의 행적을 취재했던 소설가 송준씨(39)는 최근 백석의 미망인 리윤희 씨(생존시 76세)와 장남 화제 씨가 1999년 2월 중국 조선족을 통해 보내온 서신과 말년의 백석 사진 두 점을 공개했다.
◇소설가 송준씨 北유족 통해 서신·사진 입수 공개
이에 따르면 백석은 1963년 북한 협동농장에서 51세로 사망한 것으로 국내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압록강 인근인 양강도 삼수군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문학도들을 양성하다가 1995년 1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떠난 것으로 밝혀졌다. (탄생 1912년 7월 1일)
백석이 오랫동안 생존했다는 사실은 함께 공개된 사진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백석이 70대 중반이었을 즈음,집 근처에서 부인 리씨, 둘째 아들 중축, 그리고 막내딸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과 북한 인민증에 붙어있던 독사진이 그것이다.청년기 때 사진에서 볼 수 있던 그의 맑은 인상이 말년에도 남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국내 문단에는 백석이 일제 말기에 만주에서 살았으며 해방 이후 국내로 들어와 신의주와 평안북도 정주에 거주했다는사실만 알려져 있으며 한국전쟁 이후 행적은 거의 전해지지 않았다.부인 리윤희 씨에 따르면 백석과는 1945년말 북한에서 결혼했으며 슬하에 3남2녀를 두었다는 것. 리씨는 백석의 두 번째 부인이다.
리윤희 씨는 둘째 아들 중축씨가 대필한 편지를 통해 남한에 알려지지 않았던 백석의 거취를 상세하게 적었다.리씨는 편지에서 “남편과 결혼한 이후 평양시에서 살다가 1959년 ‘붉은 편지 사건’ 이후 삼수 관평리로 옮겨와현재까지 살고 있으며 남편은 95년 83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전했다.
‘붉은 편지 사건’이란 북한에서 ‘천리마 운동’이 한창이던 1959년 당성(黨性)이 약한 것으로지목받은 작가들을 지방 생산현장으로 내려 보낸 운동이다.
한편 백석은 1959년 이전까지 평양 동대원구역에 살면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외국문학 번역창작실’에서러시아 소설과 시 등 번역과 창작에 몰두한 것으로 밝혀졌다.
부인 리씨는 “글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던 백석은 삼수군으로 내려와 농장원으로 일했지만 농사일을 제대로 못해마을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전했다. 백석은 도리깨질을 못해 처녀애들에게 배웠을 정도였으며,
너무 창피해서 달밤에 혼자 김매기를 연습했다.
하지만 백석은 ‘하루에 한 사람을 열 번 만나도 매번 가슴에 손을 얹고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고 지나가곤’ 할 정도로성품이 겸손해 삼수군 사람들 중 백석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그 후 백석은 삼수군 문화회관에서 당시 문학에 포부를 지닌 청소년들에게 문학 창작지도에 힘썼으며,그에게 문학을 배운 많은 청년들이 중앙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고 전했다.
백석은 평양을 떠난 이후 거의 창작 활동을 하지 않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1961년 북한의 조선작가동맹이발행하는 문학지 ‘조선문학’ 12월호에 ‘돌아온 사람’ 등 농촌 정경을 담은 시 세 편을 발표한 것이 마지막이다.
백석의 집에는 그의 창작 노트 등 그에 관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장남 화제 씨는송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버지가 생존시 남겼던 번역소설 원고도 이젠 많은 세월이 흘러오면서다 휴지로 써 버렸다”고 말했다.
‘백석 전집’(창작과비평사·1987년)을 펴낸 이동순 교수(영남대 국문과)는 이들 자료를 검토한 뒤“편지에 담긴 내용이 기존에 단편적으로 알려져 온 백석의 행적과 시간적 논리적으로 딱 맞아 떨어진다”면서“지금까지 나온 백석의 연표를 모두 새로 써야할 만큼 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송준씨는 2년이 지난 지금 관련자료를 공개한 이유에 대해 “이제는 이산가족이 오고갈 정도로 남북 관계가 좋아져서 지금 편지를 공개해도 북한의 유가족이 피해를 입지 않을 것으로 생각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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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고 영어도 잘했고,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 일본어 다 했다는 썰 있음)
조선일보 후원 장학생 선발시험에 붙어 일본의 아오야마학원 전문부 영어사범과에서 유학도 함.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당선.
유학 마친 후 조선일보에 입사, 교정부에서 근무하며 계열잡지인 ‘여성’의 편집을 맡음.
틈틈히 쓴 시를 모아 첫 시집 ‘사슴’을 간행.
함경도에서 교사 일을 하다가 서울로 돌아와서 다시 조선일보 편집일을 하고, 작품활동을 계속 함.
해방 후 평안북도 신의주시로 귀국했다가, 고향 정주군으로 돌아온 백석은 그곳에서 남북 분단을 맞았고 자연스레 북한 사람이 되었다.
-북한에서
북한에서도 평양에 살며 문학활동을 했으나 ‘붉은 편지 사건’-당성(黨性)이 약한 작가들을 지방 생산현장으로 내려보낸 일’을 계기로
지방에 내려가서 살았음.
양치기, 농사일을 했고, 동네에서 유명시인이라 소문나서 아이들 문학창작지도 등도 했다고 함.
월북 작가라고 언급 금지되었던 적도 있지만, 원래 이북 태생이고 북한에서 많이 활동했기 때문에 월북이라는 표현에는 무리가 있다고 함. 원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라는
– 북한 잔류 이유 (출처 나무위키)
8.15 광복 후 스승 조만식의 부름을 받고, 평양에 머무르면서 비서 겸 러시아어 통역으로 조만식을 도왔다.
1. 고당 조만식 선생을 모셔야 한다.
2. 처 그리고 큰아들 화제만 데리고 혹은 혼자만 못 간다. 다른 가족과 친지가 너무 많아 월남하면 남은 가족 친지가 고초를 겪을 것이다.
3. 가족 친지 모두 터전이 북에 있는 서민이다. 모두 같이 간다 해도 남에서 생활 터전이 없어 더 힘들지도 모른다.
4. 이젠 감시가 심해 가고 싶어도 못 간다.
그 시절 트렌디한 모던보이 그 자체였던 백석 시인, 언어와 문학적 능력이 정말 뛰어났던 분인데
북한으로 간 후에는 문학 활동도 제대로 못하고 평범한 노인으로 늙었네요.
남한에 있었으면 문학계의 거장 대접 받고 대학 교수쯤 하셨을텐데
백석 시인 작품들이 정말 좋아서 뭔가 안타까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