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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아사쿠사의 조용한 게스트하우스의 작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창밖은 검푸르게 잠기고 있었고, 방 안은 희미한 조명 아래 적당히 따뜻했다. 마치 어딘가에서 바람이 낮게 불고 있는 듯한, 그런 밤이었다.
탁자 위에 편의점에서 골라온 일본 캔맥주 여섯 개를 일렬로 세웠다. 아사히, 에비스 126, 프리미엄 에비스, 에비스 마이스터, 기린의 쿠마모토 한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을 한정 ‘아키아지(秋味)’. 마치 오래된 재즈 LP처럼 각자의 빛깔과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건 단순한 맥주가 아니었다. 시간의 단편들이었고, 계절의 숨결이었으며, 작지만 분명한 선택의 기쁨이었다.
나는 먼저 에비스 126을 골랐다. 숫자 속에 무언가의 기념이 숨어 있을 것 같았고, 파란 캔은 그 밤의 기온과 잘 어울렸다. 한 모금 마시자, 머릿속엔 쓸쓸하고도 달콤한 색깔의 멜로디가 울렸다. 다음은 프리미엄 에비스. 맥아 100%, 붉은 캔, 조금은 진지하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그건 마치 잘 만들어진 문장 하나를 읽는 것 같았다. 별로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러나 잊히지 않는 문장.
가을 한정 맥주를 마실 때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맥주라는 건 단지 목을 적시는 음료가 아니라, 지금 이 계절과 나 자신을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히 확인하는 방식일지도 몰라.””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한정판 맥주는 약간의 축제 같았다. 아무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지고, 아주 사소한 차이를 소중하게 느끼게 해주는, 그런 축제 말이다.
에비스도 한정판이 나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마이스터 캔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걸 보면, 변하지 않는 것 같던 브랜드도 언젠가 살짝 미소 짓듯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는구나 싶었다.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겠지.
밤은 그렇게 깊어졌고, 탁자 위의 캔들을 어느덧 모두 비웠다.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사쿠사의 붉은절이 촛불처럼 빛나고 있다. 마치 맥주가 아니라 이야기 한 페이지를 다 마신 것처럼, 가볍고도 충만한 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