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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한타 시도 결과, 행주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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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한타 시도의 결과 행주대접
Bucephalae오 ‘I:
추천 13 | 비추천 0 | 덧글 5 | 조회수 828
작성일 2025-04-20 11.23.09
수정일
2025-04-20 11.24.01
https Ilarca live/bliloveanimal/134492500 <
임진왜관이 발발한 지 8개월이 지나가는 시점 조선군과 일본군은
양쪽 모두 꽤나 메통한 상태에 놓여있없음
일본군은 개전 1 ~2개원차부터 온 사방에서 몰아치는 조선군의 반
겪으로 인한 피해와 흑독한 한반도의 겨울+보급로 차단 콤보에 따른
극심한 비전투 손실올 겪으며 점차 공세 능력올 상실한 채 점령지 유
지에만 집중하기 시작햇고
조선군은 본토인 만큼 병력 수급은 원활햇지만 또 본토가 전쟁터가
되어 약달당하고 있던 탓에 점차 10만 단위의 대규모 병력(1592년
말 기준 11만 8000명이 동원-)올 장기간 운용할 만한 보급 능력이
고갈되어가고 있없지
그러던 중 1592년 7월 명균이 참전햇고 일런의 반격 작전 끝에 15
93년 1월 조선군과 명균은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함
그리고 명군 5만 명까지 보급해쥐야 되는 바람에 가중된 보급 소요
로 점점 골치가 아파오고 있던 조선군 수뇌부는 이틀 기회로 아예 크
게 한타루 벌여서 전쟁을 조기증결시키논 플랜올 짜게 되없음
평양성올 탈환하고 파주까지 온 조명 연합군의 남하지 견제하기 위
해 대다수의 일본군이 한양으로 집결하고 있으니 적이 한양에 집결
올 마침올 때 삼남 지역의 조선군이 북상을 시작해서 명균과 함께 경
기 지역의 일본군올 포위 섬명하자는 것
그렇게 도원수 권율의 주도 하에 명균과 연계한 한양 탈환 작전의 준
비가 시작되없음
조선군은 어차피 일본군이 일부 거점 수비병력올 제외하고 한양으로
집결한 상황이니 후방울 질길 염려도 없젯다 삼남 지역의 군현이 텅
비어서 불안하다 소리가 나올 정도로 극한까지 병력올 끌어내어 육
로와 해로 양면으로 북상올 시작햇고
이순신의 원맨소로 여유롭다 못해 전력이 남아돌던 수군에서는 아예
정걸이 이끄는 충청도 함대가 통째로 파견되어 150척의 선박으로
이 대규모 전력의 보급올 전담하게 되없지
그렇게 경기 남부에 도착한 조선군은 명균이 남하지 시작하면 당장
한양의 일본군 거울들올 싹 갈아엎올 수 있도록 병력올 나누어 곳곳
에 배치하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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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처관연
광교산에 전라병사 선거이가 인슬해온 전라도 지역군 주력이 배치되
엇고 통진(현재의 김포)에는 충청 감사 허육의 충청도 지역군이 진
입하여 일본군과 대치하기 시작함
양천(현재 양천구)에는 소모사 변이중의 부대가 거점을 확보햇고 강
화도에 있던 창의사 김천일의 의병대도 호응에 나석으며, 그 외에도
방어사 고언백 방어사 이시언; 조방장 조희현과 운선정 이산위 등이
지위하는 분견대들이 한양의 남쪽올 감싸듯이 배치되없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원수 권율이 직접 이끄는 3000명의 병력이 한
강을 건너가 행주산성에 알박기틀 시전함
이제 파주의 명균이 남하해서 조선군과 연계해주기만 하면 순조롭게
일본군올 포위할 수 잇는 상황이엎논데 .
벽제관 전투로 제독 이여송이 겁을 먹고 파주에 둘러앉아 버리면서
모든 계획이 전부 망가짐
명균이 움직이지 않으니 발이 풀려버린 일본군은 곧바로 한양 남쪽
에 넓게 전개한 조선군올 견제하기 시작햇고 파주에서 남하하는 명
군과 합류하려고 행주산성까지 북상햇던 권율은 즐지에 꼴랑 3000
명의 병력만 데리고 한강올 등진 채 일본군에게 포위되어버린 꼴이

그리고 일본군은 겁 없이 강을 건너서 알박기틀 시도한 이 패심한 조
선군올 박살내기 위해 3만여 명의 병력올 투입해 공격하니 이 전투
가 바로 행주 대접
보급 문제로 더 이상의 전쟁 장기화틀 피해야 한다는 결론올 내리고
영혼까지 끌어모아 한타루 준비행는데 명균이 움직이지 않아서 한타
눈 흐지부지되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엇게 된 일본군이 선공올 가한
결과가 행주 대칠인 것임
조선군은 전쟁의 마지막이 되없어야 할 최종 결전올 위해 보급 역량
올 극한까지 짜내어 한 달 사이 10만 석의 군량올 소모할 정도의 병
력올 동원햇으나 최종 결전은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끝나버럿고
이때 혹사당한 행정보급 능력이 봉과해버리는 바람에 7년올 더 이어
진 전쟁 기간 내내 조선은 개전 초기 17만 명의 동원 역량이 3만 명
내외로 조그라든 채 명군에게 의지하여 피해 복구에 전념해야 하는
신세가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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