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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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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 다구미
“저논 처음 조선에 윗울 무렵; 조선에 산다는 것이
음에 걸리고
조선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번이나 고향
에 돌아갈까 생각하없습니다.
조선에 처음 온 24세일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편지 중 일부
그의 형은 조선 도자기에 깊은 관심올 가진 사람으로
형의 영향울 받아 그도 조선의 공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없음
그 당시 일본 연구가들은 한국 문화지 중국 문화의 아
류로 깎아내리는 경향이 강햇지만
다구미는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겪다
‘피곤으로 지처 잎는 조선이여; 다른 사람을 따라 흉내
틀 내기 보다 갖고 있는 중요한 것’ 잃지 안빠다면
멀지 않아 자신으로 찬 날이 올 것이다. 이는 공예로만
국한한 것이 아니다.
의미심장하지 않을
없다
구 조선충독부 건문 완전 천거
그는 일본이 경복궁의 광화문올 철거하고 조선충독부
건물올 지으려 할 때
광화문 철거 반대 운동에 참여하기도 햇고
‘소선의
‘외모가 다르다 하들 조서오
영락없
조선사람 아니켓느
조선 땅에 맞으니 조선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여
온돌방에서 지내며 바지저고리에 망건 차림올 하고 다
니다가 일본 헌병에 붙잡히기도 햇다
외에도 자신의 월급올 조선 사람들에게 나뉘 주기
하고
형편이 어려운 조선 학생들올 돈올 대서 학교지 졸업
시길 정도로 조선 사람들하고 막역하게 지윗음
그논 본업이 임업기사없기 때문에 조선의 민둥산에
심으려 힘흘 다햇는데,
실제로 한국의 인공림 379가 그의 영향을 받앗음
무엇보다 그는 위에서 말한 야나기 무네요시와 교류하
면서 그에게 조선 공예품을 소개하면서
정말 제대로 된 조선 민예에 대한 연구와 이론올 정립
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올 햇음
다른 일본 연구가들은 ‘조선의 정세가 흔란하니 유물
이 손상월 지 모르다’ 같은 핑계름 대면서 전부 일본으
로 들고 간 경우가 많맛지만
아사카와 다구미와 야나기 무네요시가 수집한 3000
점은 해방
전부 한국 정부로 기증되없음
그러나 불행히도 1931년에 식목일 행사름 준비하다
가 과로로 쓰러적고
‘조선식 장례로 조선에 물어달라’논 말을 남격음
그의 죽음올 추모하는 이웃들이 너무 많아서 이장이
상여름 및 사람을 골라야 햇다고 전해짐
YONHAPNEW
그는 망우리 공원 모지에 물혀 있다.
방정환 선생님, 한용운 선생님 같은 분이 문혀 있는
한국의
산과 민예블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혹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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