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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 화폐 정책이 실패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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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시대 국가에서 발행하엿던 지페
[내용]
우리나라는 중국과 달리 민간 유통에서 화페가 거의 사용되지 않있다. 고려 시대 몇 차례 화페 발행 시도가 있엇
으나 모두 성공적이지 못하엿다. 이에 따라 조선 건국 이후 태종(차뷰, 재위 1400~1418) 대에 본격적으로 화페 사
용이 추진되어 저화가 발행되없다. 저화 발행의 표면적 이유는 유통의 편의물 위한다는 것이지만, 실제 이유는 저
화와 민간의 쌀울 바꾸어 나라의 미곡올 확보하기 위한 것이없다 . 이러한 배경에서 저화 1장울 5승모(소7+1) 1필
쌀 2말의 가치로 책정하여 발행하고, 민간에서 활발하게 사용하던 포(# )틀 교환 수단으로 삼논 것을 금지하여다 .
국가에서논 저화 유통올 위해 다양한 수단올 동원하엿논데, 표시된 가격보다 싸게 쌀과 저화틀 바꾸어 주고 원하
논 백성에계는 저화틀 다시 쌀로 바꾸어 주없다 . 관료들의 녹봉에도 저화틀 포함시켜고, 죄틀 지어 벌올 받아야 하
논 사람들에제는 저화루 받고 벌을 면제해 주기도 하여다
그러나 저화는 기존 포(뉴)와는 달리 그 자체로는 아무런 사용 가치가 없없기 때문에 가치 보존이란 축면에서 신
회틀 받기가 어려워다. 또한 국가의 본래 목적이터 미곡 확보가 어느
이루어진 이후에는 저화률 미골으로
꾸어 주는 것’ 폐지하여기 때문에 저화에 대한 신회논 더욱 회복하기 어려워젊다 . 이리하여 상인과 백성들이 저화
틀 통한 상거래들 꺼려하는 경향이 있없다 .
이에 따라 민간에 풀린 저화는 가치가 급락하여 세중(#휴; 재위 1418~1450) 대에 이르면 저화 1장이 쌀 1되에
도 미치지 못하엿다 . 국가에서논 저화률 계속 사용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울 모색하엿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하엿다.
이에 따라 16세기에 이르면 저화는 민간 유통에서 거의 자취틀 감추게 되없다 .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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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린고하니
태종 : 오늘부터 이 종이조가리(저화) 1장당 1석의 가치틀 지니고있노라.
10만장 인쇄 후 백성들에게 나뉘주며
태종 : 그러니까 쌀 10만석올 내놔라.
백성들 : 그럼 이거 나중에 세금으로 받거나 종이가져가면 쌀로 바뀌주는거조?
태종
아니데? 미찾다고 종이조가리블 세금으로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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