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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우익의 정신적 뿌리, 야마구치현 하기 방문기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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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의 옛집은 이토 가문의 당시 신분을 생각해보면 단촐합니다.>

요시다 쇼인이 죽은 이후 조슈 번에서 서양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토를 비롯한 5명을 영국에 유학 보냈고,

(이 5명을 죠슈 파이브라고 해서 야마구치현에선 꽤 띄워줍니다)

이 때 배운 영어 실력이 이토가 나중에 출세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이토는 나중에 메이지유신에 참여하며 정부의 일원이 되는데

이 때 다시 한번 미국과 유럽을 유학하면서 근대화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이런 배경으로 인해 당시 메이지 일본의 실세였던 오쿠보 도시미치의 눈에 들면서 출세할 수 있게 됩니다.

이후 유신 1세대인 기도 다카요시(1877년 병사), 사이고 다카모리(1877년 반란 실패 후 자결), 오쿠보 도시미치(1878년 암살)가

모두 비슷한 시기에 죽는 공백 속에서 이토는 최고 실권자가 됩니다.

이토는 이후 독일의 헌법을 참고하여 ‘대일본제국 헌법’을 만들고 일본의 초대 총리가 됩니다.

이토 히로부미 옛집 옆에 있는 별저는 원래 도쿄에 지었던 것을나중에 이곳으로 이전했다고 합니다.

출세한 이후에 지어서 그런지 역시 옛집보다 훨씬 돈 많이 들여서 지은 티가 나는데, 제가 외관은 안 찍고안만 찍었네요 .

그리고 옛집과 별저 바로 옆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이 있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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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의 동상 앞에서 그의 죽음을 생각하며 사진 한방 찍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별저에 들어가서 전시를 살펴보니

이토 히로부미의 일생에 대한 약력, 조슈 파이브에 대한 설명 등과 당시 사진을 전시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조선 통감 취임 이후와 암살까지의 내용은 건조하게 사실만 적어놨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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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쪽에는 이토의 약력과 사진이 있었습니다. 한국통감 시절의 사진들입니다>

설명은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어

한국통감부가 설치되었고, 이토는 초대 통감에 취임했습니다.’라고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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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하얼빈에서 암살'입니다.>

‘1909년 러시아 장관과 만주, 조선문제에 대해 비공식적으로 논의하는 하얼빈역에서

한국의 민족운동가 안중근의 흉탄에 쓰려졌습니다. 향년 69세였습니다.

11월 4일, 히비야공원에서 국장이 치러졌습니다.””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장소는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전시를 하긴 하지만 전시물들이 그렇게 수준이 높거나 하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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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저 건물은 꽤 컸습니다. 2층까지도 공간이 있고, 그림 전시 등도 있더라구요>

다음에는 요시다 쇼인의 무덤과 탄생지까지 가보기로 했습니다.

이곳은 쇼인 신사에서 15~20분 정도 걸어 산 쪽으로 가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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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요시다 쇼인의 숙부이자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하나인 타마키 분노신의 생가가 있었습니다.>

타마키 분노신의 생가는 요시다 쇼인의 가계도 정도를 빼면 딱히 전시된 건 없었습니다.

요시다 쇼인의 무덤이 묻힌 묘지에는 쇼인 만이 아니라

요시다 쇼인의 지인들이자 조슈의 대표적인 유신지사로 꼽히는 타카스키 신사쿠나 구사카 겐즈이 등의 묘도 같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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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입구 앞에는 수많은 깃발들이 있는데 ‘쇼인 선생의 묘를 지키는 모임’이라는 글이 적혀있습니다.

죽어서도 어지간히 호강을 누린다는 생각을 하고 올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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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의 무덤입니다.>

요시다 쇼인 집안의 다른 사람들도 이곳에 묻혀있었습니다.

요시다 쇼인은 죽기 전에 “”내 몸은 비록 무사시의 들녘에 썩더라도, 영원히 남겨지는 야마토의 혼””이란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제가 도착했을 때 이 곳에 차를 끌고 한 가족들이 오더니 요시다 쇼인의 무덤에 참배를 하고 가더라구요.

이 외진 곳까지 차를 끌고 와서 참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생각해보면 요시다 쇼인이 실제 행적에 비해 과대평가를 받더라도,

일본인들에게 요시다 쇼인은여전히 흔적이 남아있지 않나 생각을 해봅니다.

이곳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요시다 쇼인이 뿌린 씨앗들이 일본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어쩌면 요시다 쇼인 본인이 뿌린 것은 별 것 아닐지 모르고, 본인조차 그렇게 될지 몰랐겠지만

그 제자들이나 친우들이 알아서크게 키웠을 그 씨앗들은일본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여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지용이 윤동주 유고 시집에서

‘동(冬)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 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라 했듯이

폭주하는 일제의 침략은 수많은 주변 국가들에게 피해를 입혔고,수많은 청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결국 나라를 망치게 했죠.

그 책임을 요시다 쇼인에게 모두 돌릴 수는 없을테지만,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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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옆에는 요시다 쇼인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

요시다 쇼인이 바다를 쳐다보는 모습을 묘사했던가 한 거 같은데 기억이 안나네요.

동상이 바라보는 곳에는 멀리 하기 시내와 바다가 내려다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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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상 근처에는 요시다 쇼인이 태어난 곳이 터로 남아있습니다.>

근처에 커다란 기념비를 세워놨는데, 이 비는 제자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쇼인 신사부터 여기까지 곳곳에 덴노가 방문했다는 기념비나 흔적들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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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이 태어난 곳 근처는 하기 시내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꽤 높은 곳이었습니다>

다음에는 신야마구치역으로 돌아가기 위한 버스를 타야 했기 때문에하기 시내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하기 시내에는 조슈 번 시절 공립학교였던 하기 메이린칸(명륜관)이 있기도 하고

하기 성이나 박물관 터 등이 있기도 했는데, 시간 상 살펴보기는 어려울 거 같아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있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태어난 곳을 가봤습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전 글에도 설명했지만

사실 일제의 아시아 침략과 군국주의화에 대해선 이토 히로부미보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영향력이 더 큽니다.

실제로 이토 히로부미는 외교적 노선을 주로 주장하고 전쟁에는 반대하는 쪽에 가까웠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비롯한 조슈의 육군 파벌과 강경파들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밀어붙여 승리하면서

실권이 야금야금 야마가타와 그 파벌들에게 넘어가고, 이토는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사실상 정치적 영향력을 잃습니다.

이에 이토가 강경파들의 견제를 피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한국 통감으로 부임하지만

결국 한국 통감 역시 조선과 일본 양국의 반발에 부딪치면서 실패하고, 이후 일본의 주도권은 사실상 강경파에게 넘어갑니다.

물론 당시 이토 히로부미나 그의 후계자 격인 사이온지 긴모치 모두 전쟁을 불사한 군부에 반대한 ‘온건파’였지만

당시 제국주의가 그랬듯이 ‘온건파’인 이들도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는데는 앞장서서 나섰다는 점은 놓치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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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 아리토모가 태어난 곳 역시 지금은 커다란 비석 하나가 세워져있습니다.>

지금은 집의 흔적도 없고, 비석도 오래되어 보였습니다.

하기의 주 관광지에서 떨어져 있는 곳이라 딱히 관리를 하거나 주목 받는다는 느낌은 안 들었습니다.

여담으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흔적을 보려면 교토 헤이안 신궁 근처 그의 별장이었던 ‘무린안’을 가보면 됩니다.

그곳에서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타로, 이토 히로부미 등이 모여 러시아 정책 방안을 논의했는데

러일전쟁 등의 내용도 이곳에서 논의되었습니다. 러일전쟁 문제는 곧 한반도 식민지화 문제와 연결되죠.

이제 버스 막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버스정류장이 있는 하기 시내 중심부로 갔습니다.

하기 버스정류장 근처에 하기 메이린칸이 있었지만 제가 갔을 때는 이미 관람시간이 끝나서 바깥만 구경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하기 중앙 공원과 하기 도서관 지역을 갔습니다.

여기에 야마가타 아리토모 동상이 있다고 적혀있어서 과연 어떨까 궁금했거든요.

주로 ‘만들어낸 신화’ 느낌이 있던 쇼인 신사와 그 근방과 달리

제대로 제국주의 시절 일본 느낌이 나는 동상을 마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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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중앙 공원을 차지하고 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동상입니다>

실제로 패전 이전에 만들어진 꽤 오래된 동상입니다.

이 동상에 대해 설명해 놓은 안내판의 내용이 재미있었던 것이

‘전쟁 이후에 연합국 최고사령부(GHQ)의 동상 철거 대상이 되었으나

일본은 물론 세계 유수의 예술 작품이라 보존하게 되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참고로 이 동상을 만든 기타무라 세이보는 일본의 유명한 조각가인데,

나중에 나가사키 평화공원의 그 유명한 평화기념상도 이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나가사키 평화공원에 가보면 평화기념상에 대해 본인이 설명을 적은게 있는데

“어느 누가 평화를 바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곳에 전 세계 평화 운동을 선구하기 위하여 이 평화기념상이 탄생되었다.”라고

적어놨던 문구를 생각하면 참 재미있더라구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지휘한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동상을 만들 때는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부족하셨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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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구경을 끝으로 하기 관광 센터에서 막차를 타고 다시 신야마구치역으로 돌아갔습니다.

하기에 대해 정리하자면 서서히 쇠락해가는 일본의 소도시 중 하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베 신조가 이곳을 다시 일본 우익의 정신적 뿌리로 만들려고 했던 시도가 이곳 저곳 보이긴 했지만,

그러기에는 그 지원을 받아들여서 다시 도시의 상황을 반전시킬 역량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베가 죽고, 정치자금 스캔들이 터지면서 여러 파벌이 해체되면서

일본의 우경화와 평화헌법 개정, 재무장 등을 추진하던 보수 방류의 힘이 전반적으로 약화되고

현재 자민당 총재와 일본 총리가 온건 성향의 기시다 후미오-이시바 시게루로 이어져오고 있는 상황에서

아베 정권 때처럼 대놓고 푸쉬를 받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아베와 이 일파들의잔불은 쉽게 꺼지지 않고 일본에서 계속 남아있습니다.

당장 지난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시게루는 국민 여론의 우위와 자민당 온건파의 지원을 받았지만

강성 우익이자 아베 신조의 행동 대장이었던 다카이치 사나에에게 가까스로 승리했을 정도로

여전히 그 영향력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일본의 방향이 어떻게 바뀌느냐에 따라

다시 요시다 쇼인과 그 제자들이 ‘일본 우익의 정신적 뿌리’를 넘어 ‘일본의 뿌리’로 내세워질 수 있고

하기 역시 ‘일본 우익의 정신적 뿌리이자 성지’가 될 수도 있는 것이죠.

물론 거기까지 바라보는 것은 너무 멀리 가는 것일지 모르겠지만요.

여러모로 한국인의 입장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 하기 여행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에 시간 나면 가고시마 치란에 있는 ‘가미카제 평화회관’ 갔었던 이야기를 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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