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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훈장 최초 일본인 수훈자,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삶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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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일본인 최초 대한민국 건국훈장 수훈
독립운동가들의 변호인 후세 다쓰지

후세 다쓰지, 변호사였던 그는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평생동안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데

특히 일제 치하에서 사회적 약자였던 조선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의 삶을 알아가다 보면 왜 그가 충분히 한국 정부의 건국 훈장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내용은

KBS 역사스페셜-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2012.03.01 방영)

‘와

월간조선 현대사 인물발굴 : 후세 다쓰지

편을 참고했습니다)

후세 다쓰지는 1880년, 미야기현 이시노마키 헤비타촌(村)의 한 농가에서 태어납니다.

그는 소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교육을 받지 않고 한학(漢學)을 공부하는데

이 때 묵자의 겸애 사상, 자유민권론자였던 아버지, 그리고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인간은 평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때 일화로 청일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동네 사람들이 조선인들을 죽인 이야기를 영웅담처럼 늘어놓고

동네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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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 다쓰지의 태어난 고향의 풍경입니다. >

그는 이후 1899년 도쿄로 상경하여 메이지법률학교(현 메이지대학 법대) 에 입학하고,

이후에는 톨스토이의 휴머니즘과 반전 사상의 영향을 받습니다.

1903년 판사검사임용시험에 합격하여검사에 임용되지만,

범죄 문제는 대부분 개인의 흉포함이 아니라 사회적 부조리로 인해 이뤄진다는 생각에

자신이 맡은 상당수 사건을 불기소하고, 이에상부와 갈등을 빚다 사임하고 변호사 생활을 시작합니다.

이후 후세는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며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고

조선 식민 지배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1911년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썼다가 조사를 받고,

1919년 도쿄에서 벌어진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조선인 유학생들이 내란죄로 기소당하자 무죄를 주장하며 변호합니다.

이후 조선인 독립운동가나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에서 겪는 사회적 차별이나 피해들을 계속 변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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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2.8 독립선언 당시 주도자들의 기념사진>

특히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와 같은 유언비어가 퍼지고

이를 당국이 잘못된 통지를 내려 기정사실화 하자

군경과 자경단 등이 사방에서 조선인들이 학살하는 광경을 목격하고조선인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합니다.

이후 조선인 학살에 대해 본인이 직접 조사하며 조선인들의 피해 규모를 파악하고,

일본의 책임을 강하게 비판하며 조선일보에 일본인으로서 사죄한다는 글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을 항의하기 위해 의열단 김지섭이 일본 황궁에 폭탄을 던지려다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김지섭을 변호하기도 합니다.

또한 유명한 박열의 ‘대역 사건’을 변호하며, 이후 박열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가 의문의 이유로 옥사하자

그의 시신을 수습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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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후미코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보도한 당시 조선일보 일부>

1923년에는 조선을 직접 방문하여 11일간 10회에 걸쳐 일제의 식민 통치를 비판하는 강연을 하는데,

이 때 동아일보가 후세의 조선 방문과 강연에서의 발언을 보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1926년 3월에는 나주 궁삼면에서 조선의 농민들과 동양척식주식회사 사이의 토지 문제 갈등으로

일본 헌병이 조선인을 살해하는 등 사건이 커지자 조선의 농민들이 후세 다쓰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이에 다시 한번 조선에 방문하며 농민들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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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방문 당시 조선 독립에 대한 강연을 하던 모습>

후세가 조선인 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노동 쟁의나 소작 쟁의, 사상범 등을 적극적으로 돕는 활동을 하자

일제에게 후세는 눈엣가시의 존재가 됩니다.

결국 1932년 일제의 치안유지법 제정 이후 후세는 치안유지법을 위반으로 두 번이나 실형을 받고 변호사 자격을 박탈 당합니다.

또한 그의 셋째 아들 후세 모리오 역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잡혀가 재판을 받게 되나,

변호사 자격 박탈로 인해 자신의 아들조차 변호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결국 후세 모리오는 1944년 교토 형무소에서 옥사하며 자식을 잃는 아픔을 겪습니다.

평생을 약자를 위해 무료 변론을 해오던 그가 변호사 자격이 박탈당하자 생활은 궁핍해졌습니다.

후세의 부인이 생계를 위해 집 일부를 하숙으로 내놓자,

이 때 조선인 유학생들이 하숙에 들어오면서 생활비를 일부 대주었고,

우유 배달을 하던 조선인 유학생은 우유 두 병을 후세의 집에 두고 가기도 했다고 하는 등

조선인들 역시 어려움에 처한 후세를 도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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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시 스스무
조선인 유학생

<후세 다쓰지의 외손자 오이시 스스무와 조선인 유학생이 찍은 사진>

1945년, 일제의 패망 후 변호사 자격을 회복한 후세는 다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변론을 재개합니다.

오사카, 고베 지역의 조선인학교 투쟁의 변호인으로,

생계를 위해 밀주를 팔던 재일조선인들을 당국이 잡아가자

‘조선인들을 끌고 왔으면서 생계 수단조차 막으며 국가가 조선인들을 책임지고 있지 않다.’면서 변호하기도 합니다.

1949년 11월 도쿄에서 개최된 ‘후세 다쓰지 탄생 70년 축하 인권옹호선언대회’에선

3000명이 참여하는데 이중 약 800여명이 조선인들이었다고 합니다.

이 때 당시 한 조선인이 했던 말을 옮겨봅니다.

“”후세 다쓰지 선생의 투쟁심은 조선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유·독립·평화·평등·호혜의 정신에 의거한 참 정의를 사랑하는 선생의 세계관에서,

용솟음치는 인류애에서 나왔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타민족의 기분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자민족의 독립이나 인권은 결코 존중받을 수 없습니다.

타민족의 독립과 문화를 존중할 줄 모르고 오히려 유린하려는 사람이

자민족의 문화와 교육도 아무 거리낌 없이 유린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의 애국자를 도와주신 선생에 대해,

또 일본의 독립을 위해, 일본 인민의 기본적 인권의 옹호를 위해 싸워 온 선생에 대해

우리는 심심한 경의를 표합니다.””

이렇게 평생을 조선인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헌신해왔던 후세 다쓰지는 1953년 대장암으로 사망합니다.

장례식에는 많은 조선인이 고별식 장의위원으로 참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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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후세 다쓰지 고별회의 사진>

그의 무덤은 도쿄 이케부쿠로 근방 조자이지(常在寺)에 모셔져 있습니다.

이케부쿠로 근처에 있으니 이케부쿠로에 가실 분들이라면 방문하셔도 좋을 듯 싶습니다.

(위치 :

https://maps.app.goo.gl/7KsdKdPJw61wf8zF6

)

후세 다쓰지는 평생동안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헌신해오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수많은 인생의 고난을 겪었으나, 그의 뜻은 결코 꺾이지 않았습니다.

후세 다쓰지가 받은 대한민국 건국 훈장은 사회적 약자를 위해 평생을 헌신해 온 삶이 돌고 돌아 하나의 결실이 된게 아닌가 하네요.

글의 마지막은 늘 어렵네요.

후세 다쓰지가 했던 말 중 그가 평생에 걸쳐 지키려 했던 신념이자, 그의 인생을 요약한 말로 마무리합니다.

위의 고별식 사진을 비롯해 후세 다쓰지를 기념하는 행사나 기념비에 항상 적혀있는 문구입니다.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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