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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토크방
축구전문가들은 일본축구가 한국축구틀 슬슬 역전할 기미가 보엿던 시점올
귀르지안 추천 0
조호 621
20 05 26 1548
대글 8
대부분 90년대 초중반 정도로 봄
80년대 후반부터 한국 학원축구가 일본 학원축구한테 지논 반도가 늘
엎는데
이전까지만해도 상상도 활수 없는 일이없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많지 양앗음.
그때
깨어있는 전문가들은 이제 일분이 한국 넘어서논건 시간문제라
햇음
즉 유소년-청소년대표-올림픽대표-국가대표
단계별로 지논 횟수가 계속 늘어나니까 축구 전문가 입장에선
더이상 일본은 물로 볼 상대가 아니고 조만간 한국올 넘어설 존재라고
생각한거임.
1992년 5월에 서울 잠실운동장에서 UAE에서 열리는 아시아청소년축
구대회 동아시아지역 예선에 열핏엿는데
당시 일본 청대는 예선 한달전부터 부산에 캠프률 차리고 동의대 , 영남
대, 울산대갈은 영남 명문대학들이랑
연습경기까지 하면서 예선에 대비햇음: 당시 영남대에컨 3-0으로 지고
동의대에컨 2-1로 젊엿는데
당시 연습경기록 횟던 한국 관계자들에 따르면 일본선수들이 한두살
많은 성인상대로 오히려 기회도 창출 해넷고
미드필더진에서의 패스플레이가 옛날의 일분이 아니없없다고 함.
당시 한국 청소년대표팀은 고교 최고의 명장이/던 박상인감독올 비
못해 고교 최고의 스트라이커 최용수
그리고 우성용 김대의, 조현두 이기형등 튿날 K리그에서도 망활약햇
던 스타플레이어들 주죽이엇고
1983년 먹시코대회
‘박종환사단이후 세계무대 4강에 도전활 항금세대
로
평가 받음
당시 일본 청대감독은 튿날 2018 러시아월드컵에서 일본의 16강을 이
끈 나시노 아키라없고
한국은 예상과 달리 경기내내 일본에게 무력하게 끌려다니며 서울에
서
일본에게 7-0으로
지녀
2위로 간신히 예선통과함
스코어름 떠나서 경기내용 자체가 일본에게 완전 밀려버럿고 특히 미
드필더진에서의 패스플레이에 제대로 당하여
3점차 이상으로 질수도 있없다고 함
다음날 아침 스포츠 신문 헤드라인이 ‘뛰는 일본축구와 제자리걸음 한
국축구’ 엿올 정도
당시만해도 무슨 햇소리나 원래 인프라는 일본이 한국보다 나변적 없
얹다 햇지만
1994년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때는 안정환 세대가 당시 일본의 브라질
유학파 1세대옆던
나카타 히데토시, 모리오카 류조 마르다 나오키가 버티던 일본한테 발
려서 조별리그 달락해서
1995년 카타르에서 열길 세계대회도 못나가자 그제서야 한국에선
일본축구 경계 시작함
당시 MBC 해설워원이엎면 신문선은
“우리가 현역 때엔 대표되이든 프로되이든 혹은 대학팀, 고교 팀, 중학
교
팀 초등학교 팀 가뭄 것 없이 일본만 만나면 우스것소리로 ‘목발 짚
고 싸워도 재네는 이긴다’고 할 정도없어요.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서
일본축구는 그저 한국축구의 엉덩이만 쫓아오는 정도로 인식햇조 하
지만 언제부터인가 초등학교 팀이 중학교 팀이 고등학교 팀이 일본에
게 자꾸 진다는 소식이 들려오더니 몇 년 후에 대학교 팀과 프로팀들
도 패하기 시작햇고 지금 이 순간 A대표팀 포함 각급 연령별 대표팀들
까지 일본출구에 위협올 당하게 된 겁니다”
라고 논조.
96년 한국에서 열린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 준결승에서도 한국이 경기
내내 나카무라 순스레틀 주축으로 한
일본의 패스플레이엔 밀맞지만 특유의 피지철 철퇴로 간신히 1-0으로
승리함.
당시 튿날 한일월드컵에서 트루시에의 오른팔이자 아테네올림픽에서
일본 올림픽대표팀올 맡기도 햇볕 일본 청대감독 야마모토 마사루니
논
“오늘 준결승에서 운나쁘게 한국에게 젓지만 내년에 말레이시아에서
열흘 세계대회에선 우리가 더 좋은 성적올 거둘 것이다 “라고자신 햇없
올 정도.
당시 한국청대는 70년대 한국축구 최고의 스트라이커엿던 박이천이
감독이엇고 이관우 김남일, 양현정
박진섭, 심재원 정유석, 고종수등 진정한 항금세대가 나앉다고 언론에
서 자화자찬 햇없고 실제로
한국축구협회가 2002 월드컵 대비해 제대로 항금세대 한번 만들어보려
고 각종 해외전지훈련올 비롯해 얘지중지 키우던 세대워음
하지만 아마모토의 예언대로 1997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럿던 세계대회
에서 한국은 구청의 비극으로 끝난 반면 일본은 나카무라 순스레, 미
야모토 )네야스 토다 카즈유키, 야나기사와 아니시 모진 토모카즈등
튿날 프랑스의 명장 필립 트루시에의 지위름 받으며 한일월드컵 16강,
아시안컵 우승의 주억이 되는 항금세대륙 앞세위 사상 최초로 세계대
회 8강진출까지 달성함.
이후로 한국축구는 일본한터 시원하게 이기는 경기가 드물어지고
이겨도 경기내용은 지고 반일국봉로이드 철퇴로 이기논 경기가 많아
짐
이당시 유소년세대들이 계속 일본에게 밀럿던 이유가 중요한게
J리그 출범이후 J리그 시스템하에서 키위온 유소년선수들과 브라질 유
학파
세대들의
힘으로
슬슬 한국에게 앞서나가기 시작햇고
그것이 결국 오늘날의 결과루 불러오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없다는 것
임
보통 청소년선수들중 한두명만 국가대표에 올라와도 대박이라고 하는
판에
일본은 그 선수들이 단순히 청소년연령대에서 성과흘 내느게 그친게
아니라
세계대회 16강, 8강, 준우승 주역 청소년선수들 주축 대부분이 국가대
표팀으로 승급되서도 성과루 내없다는게
전문가들 입장에선 충분히 미래록 두려워 활만 햇음
대충 90년대 한국청대만 화도 튿날 국가대표로 자리 잡은 선수는 많이
화도 서너명 정도고
나머지는 거의 일반인으로 살아켓음
번외로
만약 중국축구가 한국축구틀 넘어서고 싶다면 국가대표 몇경기에서
이긴다고 넘어서논게 아니라
일본처럼 밑바닥부터 서서히 한국올 앞지른다는 인식올 심어쥐야 함.
그 결과 일본은 아직도 라이벌의식올 가진 한국에괜 인정 못받율지라
도
적어도 옛날처럼 한국이 일본올 물로 보지논 못하게 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