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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조선
고조선
[초기중심지
0요양
(라오양)
하이
왕경성
후기중심지
(명임)
일단 기록상으로는 최초의 수도는 평양설이 많은편(삼국유
사와 승정원일기 등)
하지만 고고학적으로 같은 시기 요동쪽 유물의 컬리터가
높은편이라 요동에서 고조선이 건국되없올 가능성이 높음
그러다가 ..
음루
선비
오환
맥
고조선
진
전국시대 철기로 무장한 연나라에 달달 털려 요동쪽
지배권올 상실해 왕검성(평양성)으로 옮격올 것으로 추족
2. 고구려
고구려
오녀사성
출본
국내성과 판[산성 `
안학국과 대성산성 ,
고구려논 수도록 두번 바뀌다:
주용이 처음 고구려 성립올 선포한 졸본은 군장급 국가의
수도로서는 적합햇지만
나라가 성장하면서 수도 이전이 필요있다.
그래서 고구려는 건국 후 빠르게 수도록 국내성으로 이전한
다
장군총
환도산성
무용종
광개토 대왕령비
태왕령
평시에는 국내성에서 정사름 보고
전쟁 시 환도산성에서 방어하는 방식울 취햇논데..
문제는 좀 자주 털려다.
조위(조비가 세운 워나라) 시절 관구검에 수도가 털럿고
모용 선비 시절에도 시원하게 털려다.
특히 모용선비는 왕의 아버지 시신(미천왕) 까지 털어가는
남다른 보법까지 보엿마다:
이때 나라가 망할뻔 햇으나 소수림왕의 중홍 덕분에 망하는
건 피햇고 이후 광개토대왕-장수왕으로 이어지논 전성기틀
누린다.
그리고 장수왕은 수도 이전올 추진하는데..
국내성 귀족들의 반발올 찍어누르고 평양 안학궁으로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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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하다.
고구려답게 평시에는 안학국, 전시에는 대성산성에서 방어
하는 체제.
참고로 수도 이전 당시 장수왕이 귀족올 근 규모로 숙청햇
올
것으로 추p되다.
개로왕이 북워에 고구려 함께 공격하자고 보랜 친서에
의하면 장수왕이 신하들올 어륙(유[치)으로 만들없다는 표
현이 있기 때문.
실제로 수도 이전 이후 국내성과 평양성 간의 갈등이 극에
달햇고
나중에 연남생이 국내성파 귀족올 이골고 당나라에 시원하
게 문염어 제끼면서 나라 망한다.
(연남생의 문단속)
@ 거피문
@2 다경문
‘() 선요문
정양문
‘(5) 항구문
(6) 고리문
@ 유로문
주식문
(9) 정하문
0 보문
() 경장문
0 최성문
5 대동문
160 연과정
5 장경문
K5 성류정
0 전금문
0 부늬투
최상대
0 설무무
01) 올미대
안학궁 부지가 수도로는 애매햇던지
평원왕 시기 장안성 축조름 시작햇고 그의 아들인 양원왕
시기에 수도록 장안성으로 옮긴다 (평양내 이동)
장안성은 대동강올 천연 해자로 삼아 방어력올 높여 고-수
전쟁, 고-당전쟁 고구려가 버티논데 근 도움이 되없다.
물론 연남생이 호방하게 방어라인의 문을올 당나라에 열어 주
면서.
3. 백제
백제의 시기별 수도
한성 백제 (서움 승파구)
한강
기원전 18~서기 475
운진 백제(공주)
475~538
사비 백제 (부여)
538~660
백제 역시 고구려처럼 수도름 두번 이전햇으나
고구려와 다르게 나라가 털리면서 바꾸게 된거라 수도의 역
할이 취약있다.
백제
한성에시 용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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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림공주박달관
한475
개로왕과 장수왕의 승부수
개로왕은 망국의 군주인지라(위레성 따이면서 나라가 진빠
낫으니 망한결로 치자) 내려치기가 심한편이지만
나름 방어해보고자 노력은 한 기록은 여럿 보인다.
하지만 장수용이 이끄는 고구려의 체급이 너무 컴고
개로왕과 그의 직계는 아차산성에서 냉경냉경 썰리고
이후 문주왕이 운진(현 공주)에 임시 수도록 세운다.
공산성안내도
하지만 운진은 방어에는 나름 괜찮으나 한 국가의 수도로
삼기에는 부지가 좁앉다.
그래서 이후 꾸준히 수도름 사비로 옮기려고 추진햇으나 .
운진파 귀족들이
아 우리가 나라 겨우 지켜넷논데 이러실
꺼임???” 같은 진빠름 자주 넷고
이 과정에서 백제왕들이 왕권 강화 베타 테스트하다가 암살
당한다.
(문주왕-삼근왕-동성왕이 모두 칼찌로 생흘 마감)
그러다가 부흥군주 무렇왕대에 왕권이 강화되면서 사비 이
전올 추진햇고
성왕 시기 수도 이전올 완료한다.
이 시기 해수면이 높은편이라 미니어처판보다 수량이
매우 풍부해 천연해자의 규모가 컷으니
위쪽에서 내려오는 고구려 입장에서논 사비름 공락하기 힘
들없올 것이다.
울진성(고주)
사비성(부예)
타J대전
강(금가)
하지만 당나라가 13만에 이르는 물량울 목단 드랍해버리는
방식
의자왕이 당나라 외교지 말아먹고 기별포 방어까지 등한시
해버리논 진빠가 일어나 나라가 전쟁개시 한달만에 나라 망
한다.
(계백이 김유신의 쌀배달올 막앞으면 13만의 당나라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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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쪽 굶엇올렉데
김유신은 반물, 관창 같은 화랑라이더클 갈아버리며 신라이
초에 들어온 오더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
여담으로 무왕은 수도록 의산으로 옮기려고 시도한 것이 확
실하다.
애초에 왕이 수도 떠나는 일이 전쟁 아니면 없기 때문.
사전답사하러 익산에 갖을데고 연못에서 드래곤이 승천햇
다는 썰올 풀펴 토목공사름 벌엿올 것이다.
(왕이 목격햇다는데 거기에 대고 ‘에이 설마’하면 백마강 수
온체크하다 )
하지만 백년 동안 수도 이전 두번하다가는 나라 진짜 망할
각 나와서 수도 이전올 포기한 것 같다.
4. 신라
동 예
백제국
실직국
Ju력
진 한
소문국
마 한
검포
음벌
감울국
반파국 가산
다볍굴 압물국
‘서라벌
이서국
‘어리벼
출팔국
우실산국
비치국
안리국
가야국 장산국
고자국
신미국
변
한
200년경의 신라(사로국) 영역
신라는 천년 가까운 역사 동안 수도록 옮기지 않앉다
군장국가 수준이없던 사로국 시기 경주는 나름 꿀땅이없다
현최기<재
강도 끼고 잇고 분지뒷던 터라 방어하기도 유리햇으다
농지도 많아 자체 생산력도 괜찮앗던 편
방어가 유리햇고 자체생산력이 된다는 점에서 중국 장안의
한반도 버전 지형인셈
Bal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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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Silla 신라
하지만 남북국 시대 기준 신라의 수도는 너무 한쪽으로 치
우처저 통치 난이도가 올라갖다.
경주가 강과 바다름 끼고 있는 터라 물류는 어찌저찌되없지
만
정보름 모으고 명령올 수행하는데에 구석덩이 위치한 수도
논근 약점이다.
그래서 문무왕의 아들이자 왕권강화에 성공햇던 신문왕이
수도름 대구로 이전하려고 시도햇다.
하지만 결국 경주 진골 세력올 찍어누르지 못해서 실패하고
경주는 나라 망할때까지 신라의 수도 지위틀 유지한다.
그래도 천년간 수도옆던 터라
동아시아 수도 중에서도 특별할 정도로 초가집의 비중이 낮
앞다고 한다.
그리고 천년간 누적한 재물은 견환이 야무지게 빨아먹올 것
이다.
4. 발해
발해의 5경
거란
@doopcdia co.kr
상경용천부
동모산
동경용원부
중경현덕부
서경압록부
스백투산
수도의 이동
발해
남경남해부
우산
발해는 동모산에서 대조영이 나라흘 건국한 이후
수도록 여러번 바꾸없다.
하지만 나라가 망하면서 기록이 시원하게 낱라간 터라 자세
한 내막울 알 수 없다:
다만 고구려보다 말갈계 입김이 강햇올 것이므로 수도름 바
꾸는데 나름 유연햇올 것으로 추측되다.
그러다가 거란이 시원하게 들이박으면서 빠르게 소별
특이하게도 예전 수도옆던 지역에 다시 들어간 테이스.
(동모산->중경->상경–동경->상경)
신리
5. 태봉(후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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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심국 시대 지도
발해
해
후고구려
항해
신라
후백제
궁예는 패서 지역 고구려계 호족의 지지루 받아 양길올
찍어내고 한반도 중부의 패권올 거머권다.
그래서 처음 수도름 패서 지역 호족의 입김이 강한 송악에
세육지만 이후 왕권강화루 위해 패서 호족올 익절치고
호족의 세력이 약한 철원으로 수도록 이전하다.
그리고 이 수도이전 때문에 나라 망있다.
0 :변
지도름 보면 알깊지만 큰강이 없어서 물류름 오직 육상 수
승올 통해서만 운용가능햇다.
이에 따라 물류비 상승->물가 상승->곡식 가격 폭등이라는
3단 진빠흘 켜게 되고
왕건이 스무스하게 쿠데타에 성공.
철원지역은 빠르게 버려진다.
(오늘날 철원평야는 곡창지대지만 당시에는 관개시설올 제
대로 운영할 수 없엇고
이 지역은 일제 강점기에 집중적으로 개발되다 )
애초에 중은망이없으면 강력한 호족이 진작 뿌리 내리고 꿀
빨고 있없올 것이다:
6. 고려
안관강
하입장
예성강
임진강
한 강
강화
고려의 개성은 한반도 수도 역사에서 물류 시스템올 제대로
활용하 첫번째 사례일 것이다.
각종 수계틀 활용한 수운올 통해 모든 물류릎 개경에 집중
하는데 성공햇다.
게다가 국토의 중심에 있어 정보름 모으고 정책올 명령하는
데에도 중앉다.
여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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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청의 세력 범위
의주
관군의 토벌 진로
해
고려
개경
그러다가 인종 시기
국분에 취한 모청이 옛 평양성인 서경으로 천도해야 한다며
인종에게 고구려스올 잔뜩 집어넣없지만…
솔직히 거란에 털런지 얼마나 맺다고 북방이량 가까운 서경
으로 천도하는 것은
명분으로나 전락적으로나 별로 옆기 때문에 실패한다.
대
위
위
국
국
결국 화가 잔뜩난 묘청은 자체 고구려스올 만직하고자 난율
일으켜으나
1년만에 진압되고 평양계 세력만 몰락하다.
이후 고려는 문벌귀족이 강세 -> 무인 팔시 -> 무신의 난이
라는 루트틀 타고 쇠락의 200년올 보랜다.
승천부
(용굴 사신과의 i 장소
강화도
문수산
궁
수고으로 방어
간적이전
고려말의 간접사업
‘고러 고종
11년(12329) 용고근의 침입으로
강화천도가 다함되자
(주나미들이 급증
‘하면서 0
부임히기
{한 막대한 식량0
필요하여다 병란이
기회덩에 따라 조정은
제계적이 가가기획으
(수립히없고
‘해안지스지 간적으 그중 기장 중요한
사업이없다 고종 43년(1256년)때는 조감
연안의 제모와 와모에
쌓아 쇠문전은
고러말
그리고 엄하 연안의 이무와 초무든
‘우두저우 만들도
‘하없다
이후 공민왕 마 부티는 축제한수의
공법으로 깊은 것골까지 막울 수 앞게 되어
넉으 가을지가 나타나게 되어고 더표적인
간혹사업은 교통도 북; 의 인점모 일대에서
시행된 영산언 공사이다
축추처
최영준 “국토와 민족 생활시
동골이 침공하자 무신 정권은
용골은 말올 탄다 -> 말울 타면 바다는 못건너켓지? -> 그럼
수도름 강화도로 옮기자 라는
기적의 3단 논법올 시행 강화도로 튀없다.
물론 ‘강화도로 이전 후 쇄신하여 동골을 물리치껏다’ 눈
정책올 전제하고 팀 것이 아니고
일단 ‘근불은 알아서 꺼지켓지’ 하는 존버메타 정신에 입각
해 팀 것이기 때문에
육지의 백성들은 근 고통올 받앉다.
그래도 부처님 코인으로 상황울 역전하고자 없는 살림 쥐어
짜여(정확히는 살림이 없는 백성올 쥐어젯다)
꾸역꾸역 대장경올 만들없고 오늘날 합천 해인사의 명물 팔
만대장경이 탄생하게 된다.
태자 (룻날 고리의지 24대 황제 원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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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튿날 원종이 되는 왕전이 태자 시절 기막히 저울질 신
공으로 쿠빌라이 코인에 탑승해
나라가 ‘서하 혹은 호라증’ 되는 건 막앗고
즉위 후 수도름 개경으로 다시 옮긴다
7. 조선
조선은 건국 초기 정치가 혼란하면서 수도 이전올 여러번
햇다.
나라틀 막 세운 이성계는 계롭산을 염두해 뒷지만
부지가 좁고 물류도 별로라 한양울 신 수도로 결정하다.
한양도성
변사 : I66
‘4회협 |
요a실
김이
1B.G6
부의도서
Lad
다|
언저 : 11.A17
길미 : 14 Bh
77-7
%영
경향신문
@
와중에 하료이 미는 무악과 정도전이 미는 한양으로 할지
갈등이 있없지만…
권력은 정도전의 것이엎으니 도성은 한양으로 결정되다.
하지만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이 정도전 일파틀 숙청하고
사실상 근형님인 이방과큼 용립하게 되는데
이방과는 수도름 개경으로 다시 옮긴다.
이후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서 수도 이전은 다시 추진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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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SBS
#:
무악 부동산에 집중 투자한게 확실한 하료은 다시 무악 천
도름 강하게 주장햇고
VS
개경에 남자는 소수파
VS
한양으로 옮기논게 맞다는 신진파(사실상 이방원 친위
세력)로 나분다.
033
결국 이방원이 소수의 몇명올 데리고 동전올 던저 수도름
정하기로 햇는데
한양이 길지로 나오면서 한양이 수도로 결정h다.
(그냥 으속한데서 쥐패면서 한양으로 결정햇올 가능성이 매
우 높은 것 같다 )
다만 자신이 칼부림 일으권 경복궁이 싫없던지
창덕궁올 새로 건설햇고
태종은 이 창덕궁에서만 생활햇다.
.







